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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Sep 06. 2024

[마술피리] 5화

K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신촌의 대학로에서 한참 들어간 곳에 있는 작고 좁은 바(bar)였다.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바에 와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곳처럼 본격적으로 운영하는 바에 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K는 능숙하게 주문을 한 다음 카운터석에 앉아서 나를 옆에 앉게 했다. 원래 자리에 앉은 다음에 주문하는 게 보편적인 룰이 아닌가 싶지만, 이상하게 보일까봐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속사포처럼 자신의 인생을 쏟아냈다.

어렸을 때는 인도네시아에서 몇 년이나 살았고, 그것 때문에 영어와 중국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다는 것, 한국으로 돌아와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처음으로 여장을 해 보고 여장남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 본격적으로 코스프레를 시작한 건 대학교에 입학해서 부모님의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하면서 ‘여자 옷’을 숨길 수 있게 되면서부터라는 것, 자신과 최근까지 팀으로 일하던 사진사에게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그는 ‘말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요’ 라는 말로 나의 질문을 차단했다—삼월에 있었던 대대적인 스튜디오 촬영을 마지막으로 촬영을 그만두고 탈덕(오타쿠 활동을 그만 둠)했다는 것 등을 시간 순서대로 설명해 주었다. 이런 설명의 장점은 듣는 사람이 이야기의 빈틈을 메우기 위한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내 앞으로 나온 진 피즈를 조금씩 마시면서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가끔씩 질문을 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네가 여장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야?”

글라스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서 흐려진 차가운 모히또를 마시면서 그가 대답했다.

“모르죠.”

“그럼 인스타그램이나, 이런 것들도 전혀 모르겠네?”

“알 방법은 있을 거에요.”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전처럼 어색한 침묵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바의 소음이 우리 사이를 완충재처럼 채워주고 있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서 알아낸 정보로 추리를 해 보면, 그의 부모는 낮과 밤이 다른 아들의 이중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부모의 친절한 무관심에 순응하며 K도 평소에는 남자 대학생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여장과 ‘남장’을 했을 때의 그를 비교하면 둘은 동일인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 또한 그가 코스프레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자아일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사진사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캐 묻고 싶었지만, 대답하지 않을 게 뻔했기에 입 밖으로 절대 꺼내지 않았다.


하나는 분명했다. 다른 어떤 여장 코스프레이어들보다, K가 여자를 자연스럽게 연기해 내고 있다는 것.

코스계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남자다운 일은 힘을 쓰거나 주먹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장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남성만이 여장을 통해 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코스프레는 자신이 되고 싶은 캐릭터로 변하는 것일 수는 있어도, 코스프레를 통해 여자가 될 수는 없다. 그녀에게 여자라는 속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소여에 불과하다. 혹은, 주어를 바꿔서 말하자면, 여성에게 가능한 가장 여성다운 행위는 남장을 통해서 남자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압도적인 재능과 노력과 타고난 얼굴 덕분에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숫자가 만 명을 넘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숫자는 때로 많은 것을 증명한다. 트위터에는 팔로워 숫자가 수백 명대에 달하는 여장 남자 계정도 있지만, 수십 명에 그치는 CD(크로스 드레서)들도 많이 있다. 그들의 여장은 많은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 완벽하게 여장을 해서 ‘여자’가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완벽한 여장이 목표가 아니라 허섭해 보이는 여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재미와 매력을 이끌어낼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진짜 ‘여자’처럼 보이는 것이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여장 자체를 성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들에게 있어 ‘여장’이라는 행위는 다른 곳으로 나아가거나 정체성을 옮겨가기 위한 간편한 수단에 불과하다.

반면에, K와 여장 코스프레이어들이 추구하는 여장은 진정한 여성-되기를 추구한다는 뜻에서 여장이라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 가까웠다. 팔로워가 만 명을 넘기지는 않지만 K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여장 계정들도 여럿 있다. 나로서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하루에 몇 시간이나 투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매일같이 화장을 예쁘게 하는 법을 연구하고 여성스러운 자세를 배우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은 제법 분명해 보였다.


나보다 훨씬 취했지만 얼굴이 변하지 않은 K와 신촌역 앞에서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미 몇 차례 문자를 교환했지만 솔은 직접 전화를 해서 뭔가를 알아내고 싶었던 것 같다.

2호선 좌석에 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솔, 오늘은 K하고 만나서 술까지 마셨어.”

“그래. 그런데 말이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듣고 싶어?”

“좋은 소식부터 들려줘.”

“올 라잇. 좋은 소식은 내가 인턴에 합격했다는 거고,”

“오? 축하해. 졸업하고 바로 인턴으로.”

“나쁜 소식은 당분간 코스프레를 그만두고 평범한 일반인으로 얌전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한 거지.”

“그게 왜 나쁜 소식이야? 일반인 좋잖아. 정상과 비정상, 압도적인 정상.”

“우리 남친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나. 하하. 술에 취해서 그런가?”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아. 그래서, 나쁜 소식인 이유는?”

“따로 데이트를 할 약속을 잡지 않는 이상 우리들은 볼 일이 없다는 것.”

“……저번에 오페라를 보러 갔을 때도—그때 너는 로리타 드레스를 입고 오기는 했지만—코스프레와는 무관한 건전한 만남을 한 거 아냐? 예컨대 영화를 보러 가거나 레스토랑에 가거나 카페에 들어가서 수다를 떨거나.”

“말하자면 그건 대학원에 들어갈 때까지 여유가 있는 네 사정이고요. 솔은 밀려오는 잡무와 돈벌이로 미친 듯 바쁘답니다. 인턴을 하면 주 40시간 풀로 일해야 돼. 한번 쓰고 버리는 인턴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채용이 될 수도 있거든.”

“주말에도 시간이 안 나?”

“난 주말에는 영어학원에 가서 강의를 해야 되고, 일요일에는 과외를 해야 돼. 뭐, 과외는 9월까지 하고 그만두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일요일에는 만날 시간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죽을 정도로 바빠질 예정이라.”

“흠.”

솔에게 K 이야기를 해서 심사를 뒤틀리게 만드는 짓은 안 하기로 했다. 그녀의 귀에는 K에 대한 잡담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2호선 좌석에 앉아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했다. 이 열차는 막차였기 때문에 차량 안에는 주로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아저씨도 취해 있고 아줌마도 취해 있고 대학생들도 취해 있고 교복 상의를 이상하게 풀어 헤친 남자 고등학생도 스테인리스 철봉을 붙잡고 곧바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었다.

문득 왜 사진 촬영을 시작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 년 전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으로 자원해서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뛰어난 여장 전문가 K와 사진을 찍겠다는 약속을 해서 여자친구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어버렸다. 물론 추측이지만, 나의 감은 예리하다. 솔이 전화까지 한 것을 보면 나와 그의 만남은 예사로운 만남이 아니었다.

이후로 솔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K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협약을 맺었다. 말하자면 둘 사이의 Don’t ask, don’t tell (묻지 않고, 말하지도 않기) 같은 것이다. 솔은 우리의 관계가 심히 걱정된다는 말을 했지만 나의 입장에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솔과 나의 관계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토요일마다 격주로 하는 촬영은 아우토반을 달리는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엄청난 수의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는 인플루언서답게 그는 촬영을 하는 내내 프로다운 모습을 보였고 나는 그를 따라다니면서 포즈를 취할 때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되었다. 한번 자세를 취하고 셔터 찰칵. 이번에는 두 팔을 모으고 시선을 위로 향하는 자세를 하고, 셔터 찰칵. K는 하나의 의상을 입을 때 다양한 각도에서 찍기를 원했고 또한 거대한 리모와 캐리어에 여러 종류의 의상을 준비해 왔으므로 자연스럽게 촬영하는 시간도 네다섯 시간으로 늘어났다. 프로야구도 평균 세 시간이면 끝나는데 다섯 시간을 촬영하고 나면 온 몸의 에너지가 빠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끝에 가서 나는 탈진해버렸다.

우리는 촬영이 끝나면 치킨집에서 치킨과 함께 맥주를 마시거나 아니면 바에서 술을 마셨다. 둘 다 젊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보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는 촬영을 마친 뒤에 나에게 5만원권 두 장을 지갑에서 꺼내서 건네었다. 슬쩍 보았을 때 그의 지갑에는 5만원권과 1만원권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세금을 내기 싫어서 현금으로만 결제하는 자영업자도 아닌데,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기묘한 면이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여장은 뛰어났지만.


그해 겨울은 복잡했다. 솔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으로 우리가 헤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이별하는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말했지만 나는 연애가 끝난 데에는 두 사람의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솔은 3개월의 인턴 기간을 마치고 정직원으로 채용이 될 뻔했지만 그 사이에 영어학원에서 풀타임 강사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서, 고민 끝에 영어학원 강사가 되기로 결단했다. 그녀는 학교 안에서도 영어를 잘 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영어학원 강사는 적성에 걸맞는 선택이지만, 매주 60시간 가까이 일한다는 것이 강사라는 직업의 단점이었다. 수업 시간만 계산하면 주당 35시간이었지만 그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과 출퇴근 시간을 계산하면 주 60시간에 하루에 10시간씩 일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바짝 벌지 않으면 미래가 암울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으므로 나는 동의했고, 서로 너무 바쁘다는 허무한 이유로 우리는 헤어졌다.

팔로워 1만 6천 명을 돌파한 K는 이제 매 주마다 촬영할 것을 요구했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가는 내년까지만 그렇게 하고 나중에는 다시 격주로 촬영을 하겠다고 말했다. 보수를 생각하면 당연히 하겠다고 말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그의 제안에는 뭔가 내키지 않는 점이 있었다. 먼저 그와 일을 하게 되면 하루를 통째로 사용해야 하는데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었다. 그와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카메라와 렌즈, 카메라에 다는 플래시, 실내에서 촬영할 때는 반사판 등을 준비해야 했고 현장에서 사진 파일을 확인하기 위해서 노트북과 카드 리더기도 가져가야 했다.

양 손에 천근같이 무거운 짐을 지고 차를 끌고 가서 스튜디오에 도착하면 오전 열한 시였다. 스튜디오에 도착하고 나서 세팅을 하면 열한 시 반이 되었고 K는 보통 그때 즈음 도착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열두 시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시간 계산은 정오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촬영을 하고 스튜디오에서 나오면 시간은 오후 네다섯 시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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