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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Sep 02. 2024

[마술피리] 4화

나는 K에게 답장을 보내서 9월 모일에 서초역 주변에 있는 아담한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대학생인 그가 저녁 시간대만 가능하다고 해서 내가 그의 사정에 맞추어서 오후 7시에 카페에서 보기로 하고, 아무런 특별한 일도 생기지 않고 무덥기만 한 한여름의 8월이 소리 없이 지나갔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서 약속한 당일이 되었다.

그 날은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아침부터 많이 바빴다. 아침 10시에는 당근마켓에 가습기를 팔기로 해서, 구매자와 직거래를 하기로 했다. 전기 킥보드를 타고 온 구매자와 직거래를 하고 나서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니까 11시 반이었다. 사진 보정을 하려고 포토샵을 열었는데 열고 보니까 보정할 사진이 하나도 없어서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다가, 점심 무렵에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8월 초에 마지막으로 전화를 했으니까 거의 한 달 만이다.

“공모전은 끝났어?”

“아니. 마감이 며칠 안 남아서 심각하게 바빠.”

“심각하게 바쁘신데 전화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심각하게 바쁜 솔의 사정을 듣고 나는 맞장구를 해 주기도 하고 이야기에서 부족한 사실을 물어보기도 하고 적절하게 누군가의 욕을 하기도 했다. 간만의 전화라서 그런가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기 전에 나는 오늘 저녁에 K를 만나기로 했고 그와의 만남이 긴장된다고 고백했다. 우리의 만남을 경계할 줄 알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더니, 예상과 다르게 만남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솔은 가벼운 목소리로 나의 이야기에 응답해 주었다.

“잘 됐네. 소문대로 한 사람만 전문적으로 찍는 전속 사진가가 될 거야? 지금까지는 나만 찍었으니까 앞으로는 많이 바빠지겠어. You should work hard.”

나는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워크 하드라…… 열심히 노력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K가 나를 필요로 할 정도면 지금 K에게는 한 명도 붙어 있지 않다는 말일 거고, 그러면 일주일에 한 탕은 뛰어야 할지도 모르겠네.”

솔이 말했다.

“한 탕이라니, 무슨 노가다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 참, K가 보수를 주겠다고 했으니까 그걸 일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바빠서 이만 끊을게. 몇 시야?”

“지금 시간? 12시 35분.”

“아니. 시간 말고 약속시간.”

“그렇지. 음…… 저녁 일곱 시에 서초에서 보기로 했어.”

“그러면 저녁을 먹고 가야겠네? That’s too bad.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한다면 더 많은 것들을 얻어낼 수 있을 텐데. 그럼 알겠어. 좋은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합장, 하면서 솔은 전화를 끊었다. 대체 무슨 의미로 보이지도 않는 합장을 말한 것인지. 갑자기 푸른 눈의 서양인이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올 때 합장을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솔은 외국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니다.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솔의 진심은 다를 것이다. 그녀는 K와 내가 페어를 꾸려 이미 일만 명이 넘는 K의 인스타그램 팔로워수를 두 배로 만들기를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낮잠을 한숨 잤다가 일어나서 K와 만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서초역 근처에 있는 분위기가 좋은 카페에 들어간 시각이 오후 6시 40분, 일찍 도착했지만 지나치게 일찍 온 것은 아니다.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아서 자리에 앉았다.

서초역 일대는 법조 타운이라서 손님이 많을 줄 알았는데 죽상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조금씩 마시는 변호사 두 명을 제외하면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만, 객은 없었다. 할 일도 없어서 나는 얼굴 표정에 차이가 없는 변호사 커플을 관찰했다. 남자 쪽은 나이가 있고 여자 쪽은 어려 보였는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선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추측이지만 둘 다 신참이고 서초동에 있는 로펌에 변호사 연수를 받으러 온 듯했다. 찡그린 표정의 남자가 말을 시작하면,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있는 여자가 말을 듣고 대답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로펌의 대표 변호사에 대한 불평이라도 하는 것 같지만, 대화가 들리지 않으니까 그들이 무슨 주제로 누구를 험담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금방 진동벨이 울려서 일어나서 바나나와 마를 넣어서 간 주스를 가지고 왔다. 시간을 확인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변호사 커플을 곁눈질하면서 K가 도착할 시간인 오후 7시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마치 구름 위에서 내리치는 번개처럼 K의 등장은 갑작스러웠다.

우선 그는 카페의 문을 열고 나타나, 출입문 옆에 앉아 있던 변호사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변호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컵을 정리하고 K에게 인사를 한 뒤에 바깥으로 나갔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두 손을 와이퍼처럼 흔들어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K는 카운터에서 주문도 하지 않고 곧장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오더니, 시를 읊기 시작했다.

“오늘 하늘색은 바이올렛에 등자색을 섞은 것 같은 멋진 하늘이었어요. 마치 천사가 춤을 추는 무도회장 같은, 아니, 포연이 흩날리는 과거 시대의 전쟁터를 보는 것 같은 기분. 오늘 하늘을 보셨나요?”

당연히 카페에 앉아 기다리느라 저녁 해가 지는 하늘 따위는 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요컨대 그는 하늘이 아름다우니까 오늘도 완벽한 날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대답해 주었다.

“‘하늘이 잿빛이라서’.”

“아시네요! 그 만화를.”

“알다마다. 그 만화를 번역한 사람이 내 지인의 지인이거든.”

지인의 지인이라는 건 아무런 관계가 아니겠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눈짓으로 자리에 앉으라고 하자, 그제야 K는 의자에 앉을 마음이 들었다는 듯이 천천히 앉았다. 이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들의 소문에 해박한 여자친구가 푸른 눈의 외국인처럼 합장을 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경고였다. 솔의 제스쳐는 과장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말했다.

“그럼 일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사진을 보셨으면 알겠지만 저는 그냥 대충 멋지게 찍는 사람이라서 요구사항이 많으면 따르기 힘들어요. 그리고 여장 코스프레는 찍어본 적이 없어서 퀄리티는 더더욱 장담하기 어렵고. 시간은 최대 일주일에 한 타임 낼 수 있고, 지금은 여유가 있지만 내년 3월부터는 대학원생이라서 여유가 없을 테니까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면 올해 안에 끝내는 게 좋을 겁니다.

더 물어보고 싶거나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해주세요.”

나는 K와 만나기 전부터 머릿속으로 정리해 둔 문장을 랩 하듯 속사포처럼 빠르게 내뱉었다. 랩과 내 말의 차이점은 음운이 있냐 없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K의 관심사는 우리의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옆에 놓인 바나나마 주스를 마셔 봐도 되냐고 물었다. 코로나가 유행한 시대였다면 당연히 거절하겠지만 그때는 코로나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K는 계산대 옆의 디스펜서를 눌러서 빨대를 가져와서 내가 마시고 있던 주스에 힘차게 꽂았다. 그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가져다 대고 쭉 하고 빨아들였다. 뭐라고 할까, 초현실적이고 이상한 광경이었다.

“누가 보면 데이트인 줄 알겠네요.”

내가 말했다. 말하고 나서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K는 빨대를 치우고 나를 올려다보더니 내 발언이 흥미로운 듯이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웃음의 의미는 수십 가지가 아니었을까.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웃음이었다.

“여자친구가 있으면 지금 우리는 데이트가 아니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바나나마 주스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나지 않아서 조금 신기했다. 비유하자면 여름 모기가 팔 위에 날아와서 소리 없이 피를 빨고 사라지는 것 같다.

“저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어디서 어떻게 알았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 것도 아니라는 뜻이리라.

“솔 님하고만 촬영하잖아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분이 S님의 여자친구일 테니까. 추리하기 쉬운 문제, 난이도 베리 이지.”

실제로 그렇다. 나는 침묵한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입술을 빨대에서 뗀 후에도 K는 아무런 말 없이 나의 눈동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할 수 없어서 내가 대화를 주도해 나가기로 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못 견딘다.

“22세 대학생이라고 하셨는데, 어디 대학 다니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만 반말을 해 버렸다. 인스타그램에서 나의 프로필을 확인했다면 나이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반말을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고, 내 행동이 옳은지 틀린지는 모르겠지만 K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은 대학교는 아니에요.”

그리고 덧붙였다.

“Y대.”

이제 나는 패턴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아이러니를 즐기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K는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지켜보면서, 가게에 들어와서 변호사 일행을 내쫓는 능력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사실 저 눈동자 안에는 더 많은 성격들이 알알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사람들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그렇다기보단, 현재 K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그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이끌려서 K 쪽에서 조금만 자극을 주어도 사람들이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 또한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K가 보여준 말투나 어법, (표본은 적지만) 행동을 보면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그를 이번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관찰했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반구형 야구모자가 아니라 챙이 넓은 모자였다. 그 아래에는 찰랑거리는 회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유전자적 관점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회색 머리카락을 가질 수 없으니, 당연히 K의 머리는 강남이나 압구정에 있는 어느 헤어샵에서 염색한 것이 분명했다. 눈동자는 검은색이지만 약간 초록빛을 띠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해가 지고 있는 오묘한 시간대이니 각막에 어디선가 날아온 초록빛이 반사되어 그렇게 보일 뿐인 가능성도 있다. 화려한 목 위 차림과 비교하면 목 아래의 옷차림은 비교적 평범했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셔츠를 입고 바지는 메종 키츠네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평범한 남색의 면바지였다. 신발까지 보려고 하면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숙여야 되어서 감히 볼 수는 없었다. 코스프레를 하는 날이 아니라서 평범하게 입고 온 것 같았다. 우리는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가 일에 관해서는 프로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빠르게 정리를 해 버렸다. K 역시도 바쁜 사람이라는 어필을 해서 우리는 이 주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다. 서로의 현생을 고려하면 가장 나은 선택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기를 ‘자신은 모든 준비를 직접 하니까, S가 복장이나 화장 등을 도와줄 필요는 없다’고 그랬다. 여장 코스프레의 화장법에 대해서는 지식이 일천했던 내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좋은 소식도 없었다.

이렇게 카페에 앉아 있는 게 피곤한 것인지 아니면 우울해 보이는 나와 같이 있어서 피곤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지만, K는 목을 한번 좌우로 꺾은 다음에 초록빛이 도는 눈으로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그 눈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K는 냉혹한 사람처럼 보였다.

“저기요.”

그가 말을 걸었다.

“네.”

“이제 슬슬 자리를 옮겨서 좀 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요?”

K의 제안을 받고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시간이 없다고 말한 다음에 도망친다.

둘째, 무슨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할지 물어본다. 본격적으로 할 말이 있다면 말이지만.

만약 내가 2번을 집어 들었을 때 K가 거짓말을 한다면 오늘 저녁 시간을 무의미하게 날려 버리겠지만, 이상하게 그런 예감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촬영을 돕는 사진사 일을 제안할 때부터 K는 솔직하게 자신의 카드를 공개했다. 그는 촬영의 대가로 보수를 준다는 말까지 했다. 그것이 나쁜 거래가 아니라면, 이번 거래도 나쁜 거래가 아닐 수 있었다. 아니라면, 애초에 거래 같은 게 아닐 수도 있는 거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내가 떠올린 [2]의 선택지를 마음속으로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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