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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Aug 28. 2024

[마술피리] 2화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면 앉은 자리에서 나올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자리를 찾으려면 반대로 좌석 사이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아직 공연 시작 전이라서 모든 좌석에는 따스한 주황색의 조명이 점등되어 있었다. 우리는 G열 가운데 좌석을 예매했기 때문에 게이트와 게이트 사이에 있는 계단을 걸어서 내려갔다. G열에는 오기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페라 공연이다 보니까 1층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고, 또 내가 선택한 구역은 전망에 비해서 가격대가 살짝 높았다. 할인을 받지 않는다면 가성비가 떨어지는 좌석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수고스럽게 무릎을 당기거나 일어날 필요 없이 여유롭게 가운데 좌석으로 들어갔다. G열의 양쪽 가장자리에 사람이 한 명씩 앉아 있었지만 내가 들어간 방향으로는 잠시 부재중이라서 그 사람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로비에서와 마찬가지로 솔의 로리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남이 뭘 입든 간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개인주의가 발전했다는 사실에 순수한 경의를 느꼈다.

솔과 나는 앞으로 보게 될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누었다. 피델리오가 무슨 내용이고 주인공이 왜 감옥에 들어갔으며 피델리오(가명으로, 진짜 이름은 레오노레다)가 그를 구출하려고 남장을 했는데 거기에 반한 여자가 있어서…… 마지막은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고 줄거리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솔은 남장을 한 여주인공에 다소 흥미를 느꼈는지 실제 배우도 여자가 연기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실제로도 드라마틱 소프라노가 연기를 하지만, 남장을 한다고 해서 다카라즈카 가극단처럼 완전히 멋진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피델리오」의 줄거리에서 남장은 어디까지나 극의 진행을 위한 설정과 수단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솔은 화제를 바꾸어서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여장남자 코스프레이어이자 인플루언서 “K”를 알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는데, 어디선가 “K”라는 이름을 들은 적은 있어도 실제로 코스프레한 사진을 본 적은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인스타그램을 열고 직접 K의 아이디를 검색해서—그녀의 비공개 계정으로 K를 팔로우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나에게 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K의 프로필에는 신상 정보가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K의 프로필은 두 줄에 불과했다. 이런 식으로.


22세. 서울, 대학생.


가끔 코스프레를 하고 사진을 올립니다.


그리고 트위터와 블로그 링크가 걸려 있었지만 딱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솔은 정사각형의 사진을 하나 터치해서 이 사진이 K가 코스프레한 것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슨 캐릭터를 코스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 나오는, 마도카를 구출하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케미 호무라였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여장 코스프레는 남자라는 티가 날 수밖에 없는데도, K는 자세히 봐도 남자라는 걸 눈치채기 어려웠다. 성인 남자의 성대에 붙어 있는 목울대도 보이지 않았고, 손목 관절이나 손등에 보이게 마련인 핏줄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에서도 이 사람이 원래 남자라는 특징을 찾기 어려웠다. 다시 말해서 K는 완벽하게 ‘여성’을 연기해 내고 있었다. 왜 여자친구가 K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다시 솔에게 돌려주며 너는 어떻게 K를 알게 되었느냐고 지나가듯이 물어보았다. 솔은 그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롱 스토리가 되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간략하게 할게. 예전에 알고 지내던 Y라는 코스프레이어가 있었는데 Y가 K와 같이 코스프레를 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야. Y는 K를 보고 첫 눈에 반해서 코스프레 촬영이 끝나고 나서 K에게 여자친구는 없냐고 물어봤는데, K의 대답이 이랬대.

- 당분간 사귈 생각이 없어서요.

그러면서 자신을 보고 너하고 사귈 생각 없으니까 포기하라는 것처럼 웃었다는 거야. 그래서 Y가 급 부끄러워져서 이야기도 안 하고 바로 뛰쳐나왔는데 나중에 보니까 K는 다른 여자 코스프레이어들한테도 똑같은 대답을 해서 철벽처럼 거절했다고 하더라니깐.”

뭐, 흔히 있는 이야기다. 매우 잘생기고 매너도 좋은 남자 레이어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이는 여자들의 소문. 그러면 여자들 사이에서는 가능성이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K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이걸 밝히면 열성팬의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에 철저하게 함구한다는 것. 두 번째, K는 클로짓 게이라는 것. 어느 쪽이든 간에 K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되지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가상의 여자친구의 존재는 K라는 인간을 신비롭게 만들 뿐이고, K가 게이라고 해서 여장을 하면 안 되는 이유로 성립하지 않는다. 즉 K는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는 이상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코스프레이어로 남는다. 솔은 내 손에서 스마트폰을 가져가면서 아무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매우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성애자 남자—헤테로—라도 K를 보면 한 눈에 반해버릴 걸.”

남자가 봐도 반해버릴 수밖에 없을 만큼 완벽한 여장을 하는 K를 보면서, 과연 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고민하면서 공연 시작까지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니 핸드폰을 끄라는 안내 방송이 귀에 들려왔다. 나는 솔이 스마트폰을 끄는 걸 확인했다.

2시간 반에 달하는 오페라 「피델리오」가 끝나고 시간은 늦은 밤이지만, 저녁을 먹기 위해서 우리는 잠실역 주변에 있는 식당을 천천히 걸으면서 탐색했다. 만약 코로나가 유행할 때 저녁을 먹어야 했다면 식당들이 모두 밤 열 시에 닫기 때문에 포장 말고는 방법이 없겠지만, 그 때는 평화로운 시절이라서 열한 시에도 영업하는 식당이 많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반적인 식당보다는 술집이나 고깃집이 많았다. 우리는 양고기를 파는 가게에 들어가서 2인 세트를 주문하고 생맥주도 한 잔씩 주문한 다음에 외투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고 편하게 의자에 걸터앉아서 공연을 보면서 쌓인 피로를 풀었다.

친절한 점원이 양고기를 구워주는 동안, 솔은 아까 이야기한 K를 「피델리오」의 남장 여자 소프라노와 비교하면서 K는 남성 배역도 여성 배역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기에 특별히 반대의견이 없었던 나는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페라는 노래를 불러야 하니까 막대기처럼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으면서 목울대도 없는 K는 낮은 목소리를 소화할 수 없을 거라고 대답했다. 거기에 솔은 자신도 오페라의 세계라면 그렇게 생각하지만, 코스프레의 세계에서 여장의 재능을 썩히는 K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고, 뭐랄까 어린 남자애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든다고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는 물었다.

“예컨대 K가 가진 여장의 재능이 다른 곳에 활용될 수 있다면, 별로 돈이 되지도 않는 코스프레보다는 그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될 거라고 너는 생각하고 있는 건가? ‘다른 곳'이 어디를 말하는지는 몰라도.”

솔도 맥주를 절반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

“그럴 수 있다고 봐. 나도 당사자로서 코스프레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K의 재능은 다른 여장 코스프레이어들과 차원이 다른 것처럼 느껴져.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만 봐도 K는 일만 명이 넘거든. 이 정도면 모델 수준이잖아? 난 K의 코스프레를 보고 순수한 열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고 해야 되나, 약간 불안한 기분도 느껴. 대학생이면 잠깐 취미로 여장을 즐기는 애들도 많이 있으니까.”

오히려 그런 취미라면 잠깐 즐기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했다. 예컨대 K의 재능을 누가 발견하고서 인스타그램 DM으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보내서, 돈의 액수를 보고 전업 모델이 되거나 여장을 전문으로 하는—그게 대체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프로가 되어서 직업을 그쪽으로 정해버리고 나면 미래의 선택지가 없어지는 셈이니까. 돈만 보고 선택하기에는 그의 나이가 아직 젊다는 것도 변수다. 스물 둘이면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을 텐데,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그 앞에 열려 있다. 여자친구가 말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전업 모델이 되지 않기를 선택할 것이다. 그야 K의 입장을 모르니, 주어진 나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화제를 바꿔서 우리는 새 촬영을 언제 시작하면 좋을지에 대해 그리고 재료에 관해서도 토론하기로 했다. 나와 나이가 같은 여자친구는 졸업을 하느라 졸업전시 작품도 준비해야되고 학점도 15학점을 듣고 있어서 막학기라고 해도 여유롭지 않았다. 취업 준비를 일 년 후로 미뤄서 그것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올해는 시간의 여유가 학기가 끝난 다음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이 6월 초니까 학기가 끝나고 졸전이 끝나면 7월 말이 될 거고, 나도 그 때부터 여유로워져서 일단 7월 말에 다시 촬영을 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새로 코스프레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진격의 거인」과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중에서 하나를 하고 싶다면서 자신이 키가 크니까 코스를 한다면 키가 작은 캐릭터를 해 보고 싶다고 그랬다. 사진사의 입장에서는 어느 캐릭터를 코스하든지 간에 잘 어울리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 솔은 원래의 생김새가 좋아서 귀여운 캐릭터도 날카로운 캐릭터도 전부 잘 어울렸다. 예전에 미시로 상무의 코스프레를 공개했을 때는 트위터 좋아요가 천 개 넘게 달려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나머지 코스프레는 그만큼 흥행한 적이 없었지만…… 아무튼, 생맥주를 오랜만에 마시니까 기분이 좋아져 세 잔이나 마셨더니 차를 끌고 갈 수 없어서 대리운전을 불러야만 했다. 솔과 잠실역에서 헤어지고 난 뒤 나는 대리운전 기사를 주차장에 불러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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