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선미, 추억마중展
연선미(55)씨는 삼호국민학교 제28회 졸업생이다. 삼호초등학교는 지명산 아래 ‘있었다.’ 연선미씨가 삼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탄진중에 다닐 무렵, 댐을 만들 테니 마을을 떠나라는 통보가 내려왔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녀가 등하교했던 삼호국민학교도, 학교 바로 옆에 있던 그녀의 집도 물에 잠겼다. 지금 그곳은 대청호라 불리우고, 지명산의 꼭대기만 살며시 눈에 잡힐 뿐이다. 수몰 전 마을의 이름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읍 미호리다.
#어린 시절, 푸르고 시린 기억
그녀의 그림엔 당시 살던 마을길이 선명히 살아 숨 쉰다. 그때 마을 살던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직접 그린 지도 다음으로는, 고양이 두 마리가 물고기를 타고 물속 고향마을로 들어간다. 물속에 들어가니 삼호국민학교라 적힌 건물이 있다. 그 교실 안에 들어가니 조개탄 난로가 있고, 칠판엔 떠든 사람 이름이 적혀 있다. 연선미씨가 실제 학교에 함께 다닌 친구들의 이름이다.
“그때 애들하고 운동장에서 말뚝박기하고,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같은 놀이하면서 즐겁게 놀았어요. 학교 끝나고 나서는 물가에서도 많이 놀았고요. 동네마다 실개천이 흘렀거든요. 쪽대로 고기도 잡고 놀고, 여기 주전자 든 아이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 사들고 징검다리 건너는 모습이에요.”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그녀 마음속엔 푸르고 시린 그 시절이 잔잔히 흐른다.
“아버지는 지게에 솥단지를 매고, 어머니는 국수와 채소 같은 것을 챙겨 와선 금강에서 물고기 잡아다 매운탕도 끓여먹곤 했어요. 금강에 너럭 바위가 많았는데, 하루 종일 물빛 햇살 받으며 그 위에 누워있기도 하고요.”
#추억마중, 엄마에게 주는 선물
그녀 전시의 제목은 ‘추억 마중’이다. 작품에서 보듯, 그녀가 고향에서 살던 추억이 우리 삶에 반갑게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마중의 의미를 한 발짝 더 설명한다.
“검정고무신 신고 조약돌 즈려 밟으며 여울을 건너거나 물가에서 올갱이나 모래무지 같은 것들 잡고 놀다가 보면, 저녁의 어스름이 찾아와요. 저녁놀 질 즘, 어머니가 마을로 마중을 나와 있던 모습이 떠올라요.”
마중의 의미는 고향에 함께 살던 어머니이기도 했다. 당시 떠오르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여장부’였다.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다섯 남매를 돌봐야 했던 상황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 게다가 대청댐이 생겨나면서는 시골에서 농사짓던 삶을 벗고, 도시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악착같이 벌어야 했던 그때였다.
“얼마 전에 물어봤어요. 아버지 없이 우리 혼자 키웠던 것도, 갑자기 이사 가야 했던 것도 어땠냐고요.” 그 말에 어머니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곁에 있는 다섯 자식들 어떻게 키울까, 오로지 그 걱정뿐이었다고. 고향에서 이주해 온 동네였던 문화동에서 새롭게 슈퍼를 시작하고, 그 뒤로 살림집을 마련하고, 그 뒤로는 친척에 세를 주며 살았다. “그때는 화장실 갈 새도 없었다”고 어머니는 그때를 회상했다고 한다.
그때 40대였던 엄마는 이제 80대가 되었다. 엄마도, 엄마의 친구들도 허리가 굽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사는 나이가 됐다. 그리고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생겨났다. “엄마가 더 나이 들기 전에,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어요.” 여행을 보내줄까 생각도 했지만, 고민 끝에 고향의 추억을 선물하기로 맘먹었다.
작년 가을부터 며칠 밤을 꼬박 밤새가며 작품을 만들었다. 그녀의 주된 전공은 일러스트레이션이었지만, 이번 전시만큼은 도자기 작품을 빚었다. “도자기 자체가 종이보단 견고하기도 하고, 깨질까봐 조심스럽게 다루는 물체잖아요. 그런 도자기의 특징이 이번 주제와 어울릴 것 같았어요.”
#작품을 빚으며 삶을 마주하다
고향을 소재로 전시를 여는 건 처음이었다. 그간 주로 함께 사는 고양이를 위주로 그려왔던 그녀에게 이번 전시는 새로운 전환점이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선물을 주었다는 것, 그보다 그녀 스스로 고향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는 그 자체로 그녀 스스로의 삶에 치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 어머니가 그랬듯, 그녀 역시 치열한 한평생 속에서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했다. “잡다한 일을 많이 하며 살았어요. 광고기획사에서도 일하고, 출판편집 일, 북아트부터 여기저기 강사로도 다니고요.” 의미가 없었던 일들은 아니었지만, 나를 위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날 문득 삶을 돌이켜보니, 내가 무언가 포장하기 급급한 삶을 보냈던 건 아닌가 싶은 거에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내 나이를 보았더니 마흔 중반이었어요.” 나를 위한 그림이 무얼까, 고민 끝에 잡힌 건 고향이었다. 고향에서 친구들과 고구마·감자 쪄먹던 기억, 자연과 어울러져 놀던 기억을 흙으로 찬찬히 빚어내며 행복을 느꼈다.
그녀의 그림을 다시 살피면, 박쥐·개구리·어름치·방아깨비 같은 생명체들이 함께 있다. 대청호에 사는 생물을 함께 둠으로써, 그들과도 함께 산다는 의미를 담았다.
“금강의 물결을 보면 참 예쁘단 생각을 하는데, 그 물결이 물 혼자만으로 생기는 건 아니더라고요. 물속에 사는 어름치가 꼬물꼬물대고, 올갱이가 촥 움직일 때 아주 작더라도 새로운 물결을 만들기도 하고, 물결 위에 태양빛이 비치고, 산의 초록빛이 비치기도 하고요.” 아름다움이 결코 혼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무언가와 공존 속에 만들어내는 것이란 깨우침도 그녀의 삶에 슬그머니 떠올랐다.
#고향을 회상하고, 공존을 사유하다
여러 군데에서 많이 들어왔던 ‘공존’, ‘상생’이란 그 단어가 연선미씨의 목소리를 통해 또렷이 전달이 됐다. 삶 속에서 강인하고 끈질기게 사유한 끝에 나온 말이라 더욱 그랬다.
“그냥 보상금액 주면 다 해결되는 것 마냥, 살던 마을에서 갑자기 내쫓았던 거잖아요. 그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 이별하는 사람들 마음, 오래 살았던 마을을 떠나야 했던 마음은 전혀 고려치 않고요. 당시 사람들도 먹고 사는데 급급하니까 치유할 겨를도 없었던 건, 저희 엄마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들이 그랬을 거에요. 그 분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제가 작품을 만들며 치유 받았던 것처럼요.”
“작품이란 게, 나 잘난 걸 보여주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치유와 울림의 순간을 선사해주는 거 같아요. 어쨌든 수몰이란 경험을 안고 있는 사람이 드물잖아요. 하나의 역사를 겪은 사람으로써, 그 경험을 사유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치유를 안겨주고 싶어요.”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전시를 계속하고 싶은 바람이다. “어렸을 때 윗집 살던 오빠가 자식들이랑 어머니랑 다 같이 전시를 보러 왔어요. 전시를 보더니, 고향에 대한 아픔 같은 것이 자기도 모르게 있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너무 고맙다고, 고향사람들끼리 한번 다 같이 만나자는 말을 했어요. 거창한 것 없어요. 그런 소소한 순간을 바라는 걸지도 몰라요.”
글 사진 임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