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간 도슨트 Nov 18. 2020

우울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경고

영화 <님포매니악>

©영화 님포매니악


  우리는 우울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다양한 답변이 나오겠으나,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다"라는 답이 주를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우울을 사랑해야 하는가'에 의문을 품는 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 삶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움직임이 모여 현실을 구성한다. 그렇기에 사랑은 세상 전체에 적용되고,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 일컬어진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이때 상대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게 된다면 이는 행복을 낳을 것이다. 반면 왜곡된 이해가 발생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파국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사의 비극은 존재를 “잘 못” 이해한 결과물이고, ‘실패한 사랑’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견고한 “정상 세계” 속에서 우울한 사람은 비정상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 겉으로 우울함을 드러내는 행위를 “우울 전시”라 칭함으로써 감정을 죽일 것을 유도하는 현상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까? 우울을 끌어안고 있는 자들을 마냥 미워하고 밀어내고,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이해받지 못한 상황이 쌓일수록, 실패한 사랑이 축적될수록 세상은 비극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울증 환자로 익히 알려진 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런 절망의 실현을 우려한다. 그는 우울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기획을 통해 목소리를 냈고, <님포매니악>은 그 기획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영화 님포매니악


  <님포매니악>은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초점 화자 조,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청자 겸 해설자 샐리그먼, 그리고 조가 들려주는 여덟 가지의 섹스 이야기가 두 인물을 오가며 이어지는 논변. 조는 라스 폰 트리에, 샐리그먼은 관객 혹은 평론가, 그리고 조가 들려주는 섹스 담(談)은 우울감이 영감으로 작용하여 탄생하게 된 감독의 영화로 치환할 수 있다. 조가 자신의 섹스와 얽힌 에피소드를 토해내듯, 트리에 감독은 자신의 우울함을 영화로 표출한다. 그러나 샐리그먼은 이야기에 사족을 달고 그 이야기의 소재와 관련되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뽐낸다. 감독의 우울 세계는 포용과 이해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 대신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분석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우울함에 공감하여 눈물을 흘리는 수용자들이 존재하듯, 샐리그먼은 조의 적극적인 섹스의 여정을 예찬한다. 조, 혹은 감독은 이들을 목격하며 진정으로 이해받을 가능성, 즉 사랑의 여지를 엿보게 되며 희망을 품어본다.

  그러나 샐리그먼의 평가는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밤중에 그녀를 강간하려 한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그는 놀란 조를 향해 “여태껏 수천 명의 남자들과 했잖아”라는 말을 내뱉고 만다. 다시 말해 샐리그먼은 그녀의 섹스를 단순히 많은 경험이라 속단하고, 자신 역시 거기에 합류해도 된다고 멋대로 판단한 셈이다. 자신 역시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실망하고 상처 입은 조는 샐리그먼을 처단하게 된다. 라스 폰 트리에가 정상 세계의 관점에서 재앙과도 같은 ‘우울’로 점철된 영화를 끊임없이 쏟아내지만, 수용자는 우울한 그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안아주려 하기보다는 “천재 감독이 또 명작을 만들어냈다"라며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절망적 상황을 그린 것이다.


©영화 님포매니악


  섹스의 화신 조는 샐리그먼이 자신의 섹스를 “잘못” 이해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게 되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러한 조의 초상을 통하여 우울한 자들을 사랑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사회에 원망을 표현한다. 정상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섹스 중독, 다시 말해 우울로 무장한 조는 정상사회와 대립 구도를 이루고, 이 갈등은 살해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감독은 이해받기는커녕, 부정당하고 터부시되는 우울의 감정을 일반 관객 앞에 던져 놓으며 경고한다. 나의 우울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해달라고. 우울을 제대로 “사랑”해달라고. 이를 해내지 못하면 우리는 비극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만약 샐리그먼이 조의 섹스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제멋대로 해석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가 우울을 감정 그 자체로 직시하고, 인정하고, 위로할 줄 알고, 제대로 “사랑”할 줄 안다면 우울함에 휘둘려 혼란 속에 빠지고 마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우울을 억누르고 감춘다. <님포매니악>은 단순히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으로 화제성을 유도한 작품이 아니다. 이 영화는 사회를 향해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감정의 종류에 상관없이 사랑하고 편견 없이 이해하는 태도를 기르기를 요구하는 감독의 호소문이자 절규이다.





글 | 이의영

편집 | 김희은





아래 월간 도슨트 인스타 계정을 통해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https://instagram.com/monthly_docent?igshid=1c09qpgfuv  

작가의 이전글 뮤지컬 <헤드윅> | 사랑의 권력관계에서 자유를 찾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