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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Jun 26. 2021

휘날리는 태극기가 가져온 피바람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이들은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나눠먹는 사이좋은 형제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혼란한 해방 전후에서 가족의 삶은 계속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곧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형제의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잠시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가봅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형제는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납니다. 형은 인민군, 동생은 국군에 있습니다. 동생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형은 동생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른 군복을 입었으니까요. 도대체 형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동생은 형을 데리고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정말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영화는 6. 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사실적으로 담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를 회피하고 동시에 해방 전후를 비현실적으로 평화롭게 묘사합니다. 과연 1950년대 원빈과 장동건 형제는 폭발하는 이념적 긴장감을 직시하지 않고 마냥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요? 그리하여 영화의 모든 스토리는 배경을 남한과 북한이 아니라 다른 나라로 바꾸어놓아도 스토리가 성립합니다. 이 영화는 195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영화는 6.25전쟁이라는 재료를 통해 더 큰 논지를 다루는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요? 바로 전사와 병사의 구분입니다. 둘이 똑같지 않냐구요? 철학자들은 이 둘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전사는 말을 안 듣는 존재입니다. 툭하면 파업합니다.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전사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전사는 원래 무규율, 위계질서에 대한 불만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러한 전사들을 국가가 포섭하여 훈육하면 병사가 됩니다. 전사가 레지스탕스 혹은 자경단이라면 병사는 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사가 병사가 되는 영화입니다. 사이좋은 형제가 서로 대립하게 된 것도 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l  전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형제는 강제로 입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형제가 입대에 저항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는 국가의 존망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관심이 없습니다. 형제는 국가를 의식하지도 않고,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습니다. 이들은 국가라는 테두리 외부에 있는 것이죠. 하지만 국가는 형제를 '징집 대상'으로 하여 강제로 포섭합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여기서 구두닦이로 생을 마감했을 형이 타고난 전사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형은 그 능력을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헌신합니다. 형은 무공훈장을 받으면 동생을 제대시킬 수 있다는 약속을 믿고 사지에 몸을 던집니다. 직접 전투를 이끌어 형제가 속한 대대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이때의 묘사를 보면 흥미롭습니다. 병사들이 상관의 명령을 받기보다 자발적으로 자원을 합니다. 전투의 양상도 게릴라 기습 작전, 즉 레지스탕스 민중 세력이 정규군을 잡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들의 싸움은 국가의 존망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니라 살기 위한 투쟁입니다. 여기까지 이들은 '전사'였습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이들의 전투가 대승을 거두자 국가가 여기에 개입합니다. 전사의 승리를 국가의 승리로 덧칠해야 하니까요. 대대장은 형의 총에 태극기를 묶어주면서 치하합니다. ‘이 태극기를 북한산 정상에 꽂아주게!’ 여기서부터 태극기라는 상징적 기호가 형을 포섭하기 시작합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이 뒤로 형은 국가 영웅으로 선전의 대상이 됩니다. 동시에 가족에게만 헌신했던 형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의 행동은 점차 전투적으로 변하고 훈장을 얻기 위해 무리하게 진입합니다. 동생은 점점 변해가는 형의 행동에 불만을 갖기 시작합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이 부분이 전사와 병사의 갈림길입니다. 형의 입장에서는 ‘동생을 위해서 훈장을 얻는 것’과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모순 없이 일치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도 헷갈렸을 겁니다. ‘내가 동생을 위해서 훈장을 얻으려고 했던가?’ 아니면 ‘나의 공명심을 위해 훈장을 얻으려고 했던가?’







l  병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전쟁이 과열되고, 형제가 속한 부대도 점차 전쟁에 익숙해집니다. 살기 위해 싸웠던 전사들은 어느새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합니다.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를 진심으로 증오하게 됩니다. 평생 이념에 관심이 없던 형도 이념 대립의 최전선에서 투쟁하는 병사가 됩니다. 형은 빨갱이와 관련이 있다면 고향 친구도 사살하는 잔혹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국가폭력의 대변자가 된 형에게 국가는 보답해줄까요? 두 국가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개인은 존중받을 수 없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던 형의 약혼녀는 빨갱이로 의심되어 반공청년단에게 살해당합니다. 반공청년단과 싸우던 동생은 사살당합니다. 동생이 아군에게 사살당하자 형은 적진에 가담하여 인민군의 영웅이 됩니다.




 


l  다시 가족의 품으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하지만 동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형이 인민군에 들어가 깃발부대의 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형은 이미 병사입니다. 그의 폭력은 완전히 국가의 맥락에 종속되어 있기에 한 국가에 배신당하면 다른 국가의 편에서 복수하게 되는 것이죠. 동생은 형을 다시 가족의 맥락에 돌려놓기 위해 전쟁터로 갑니다. 그리고 동생은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형을 발견합니다.



 


  동생은 겨우 형을 국가의 포섭에서 구원해냅니다. 형은 정신 차리고 겨우 동생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서로가 대립하는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둘 다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둘은 다른 군복을 입고 있으니까요. 형은 동생을 먼저 도망가게 합니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인민군에게 총을 쏘다가 전사합니다. 형은 다시 군복과 무관하게 가족을 위해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일시적으로 양 국가를 초월해서 가족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죠.









l  전사와 병사




  전사와 병사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국가의 존망을 나의 존망으로 삼는 동일시,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그리고 영광입니다. 형이 총에 태극기를 꽂아주는 장면을 기억하지요? 태극기의 영광은 형을 점차 병사로 만들었습니다. 끝내는 깃발부대의 대장이 되어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 영화는 참으로 오묘한 영화입니다. 제목을 보면 애국심을 고취하는 영화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끝까지 감상한다면 영화 제목이 얼마나 역설적인 제목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는 국가에 종속되는 것이 어떠한 파멸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애국심은 어느 단계에 있을까요? 우리는 국가와 스스로를 얼마나 동일시하고 있을까요?






글 | 박지원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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