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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Nov 28. 2020

[꿈글] - 헤델의 글 02

 테이델프아의 날씨는 무척 맑았다. 햇볕이 강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햇볕도 이삼일 후면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테이델프아는 오월 즈음에 보름 가까이 비가 쏟아진다. 운이 좋으면 중간중간에 해가 뜨는 날을 볼 수도 있지만 근 십년동안은 장마 기간에 해를 볼 수 있는 날은 없었다.

 헤델은 등을 다 덮을 만큼 커다란 가방에 속옷을 챙겨 넣고 있었다. 가방 앞 주머니에는 비상약으로 상비약과 진통제가 들어있었다. 약에 의존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닐 때 가벼운 통증은 크게 부담되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비상약을 꼭 챙겨 넣었다. 가방 안에는 속옷과 여벌 옷 말고도 글을 쓸 때 필요한 노트북과 충전기를 넣고 아이디어 노트 한 권과 간단한 필기도구를 담은 필통까지 챙겼다. 헤델은 느긋하게 짐을 모두 싸고는 가방의 지퍼를 힘차게 닫았다. 이틀 뒤에 떠나기로 했지만 짐은 벌써 미리 준비해두었다. 떠나기 전 이틀 동안 입을 옷들은 여럿 있었고 따로 필요한 것들도 있었기에 가방을 다시 열거나 할 일은 없었다.

 창 밖은 노을이 꺼지고 어둑한 밤이 새어 나왔다. 비를 쏟아낼 준비를 하는지 하얀 구름은 점차 회색 빛을 띄우는 듯했다. 헤델은 비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비는 헤델에게 특별히 영감을 주지 않았지만, 가끔 빗소리를 들으며 연필을 잡을 때도 있었다. (헤델은 글을 쓸 때 주로 연필을 집어 들었다.) 한 달 전쯤 부슬부슬 옅은 빗방울들이 내렸다. 그때 문득 헤델은 비를 보며 글을 쓰고 싶어 졌다. 그는 계획적이면서 상당히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행동했다. 모든 작가나 예술가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영감이 떠오를 때 바로 작업을 시작하는 아티스트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헤델은 영감에 있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헤델이 열두 살이 됐을 때 테이델프아에서 오십팔 년에 만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유성이 떨어졌다. 그때 헤델은 문학과 피아노에 유독 관심을 쏟고 있었고 떨어지는 유성을 보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들을 얼른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때부터 무언가 문학과 음악적으로 느낌을 받을 때마다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한 달 전에 내리던 비를 보았을 때도 헤델은 떠오른 생각을 노트에 적어놓았다.


비가 내렸다. 옅은 빗방울은 구슬펐다.

굵은 빗방울들은 더욱 구슬펐다. 하지만 빗방울들이 멈출 때면 한적한 여유를 뿜어냈다.

구슬프게 내리는 비가 멈춘 후, 시간이 멈춘 듯한 여유는 자연스러웠고 어울렸다.


 헤델은 꽤 유능한 작가였다. 헤델이 집필은 여러 권의 책들은 곳곳에서 호평을 받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소년의 빛’이라는 단편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고,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반면에 헤델이 적은 메모는 단조로웠다. 단지 자신이 받았던 느낌을 꾸미지 않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헤델에겐 메모의 영향은 아주 컸다. 자신이 적어놓은 메모를 다시금 볼 때면 그 날의 풍경이 눈 앞에 보이는 것 만 같았다. 헤델은 적어놓았던 메모를 다시 한번 훑고는 살며시 덮고 자신의 책장에 올려 두었다. 떠나기 전, 들뜬다거나 설렘은 크게 없었다. 그저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여행 중 매 순간마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품었다.


*


테이델프아는 상당히 넓은 나라다. 헤델은 테이델프아 외곽에 위치한 빌게온이라는 작은 마을에 거주했다. 헤델의 부모는 빌게온에서 작은 목욕탕을 꾸리고 있었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마을 사람들이었고 간혹 여행객과 행락객들이 드나들곤 했다. 빌게온의 총 가구수는 이천 가구를 넘지 않았고 요즘 들어 조금 더 줄어드는 추세였다. 마을에는 개인주택들이 군데군데 지어져 있었고 널찍한 초원이 빌게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초원에 작은 도로가 있었고 그 도로를 통해 한 시간 정도면 시놀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놀드는 빌게온보다 몇 배나 더 큰 도시였다. 시놀드에 들어서게 되면 드넓었던 초원은 어느새 막을 내린다.

 헤델은 대부분의 작업은 집에서 하곤 했다. 때때로 빌게온을 떠나 테이델프아를 여행하며 집필을 할 때도 있었고, 이번에도 곧 찾아올 장마가 시작할 때 헤델은 떠난다. 장마가 올 때 떠나는 것은 순전히 한 달 전 비를 보며 했던 생각 외 다른 이유는 없었다. 여행의 의미도 컸지만 휴식과 작품을 준비하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헤델은 휴식을 통해 작품들이 완성되었다. 휴식이 곧 그의 작업이었고 그는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다.

이른 오전부터 하늘은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장마라고 해서 장대비가 폭포처럼 쏟아지거나 하는 일은 드물었다. 비가 오래도록 쉼 없이 내릴 뿐이었다. 일기예보에는 바로 다음 날 오월 첫째 날에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헤델은 아침에 출발할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출발하고 싶은 마음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헤델은 가끔 자신을 시선과 비유하곤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다 특별한 이유 없이 땅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데로 자유로운 삶을 이었다. 그의 행동에 대해서 논리적이거나 이해는 필요하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 주는 행동은 없었고 자신의 자유로운 반경 안에서 매번 움직였다.

 헤델이 휴식과 작품을 위해 떠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와 딘 로즈아 말고는 없었다. 이아와도 크게 사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관심이 무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했고 어느새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


 하늘색 간판엔 ‘4월의 서점’이라고 하얀색 글씨로 적혀있었다. 간판 위에는 적잖이 빗물이 고여 있었다.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서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장마 때문에 하늘은 회색 빛이 맴돌았고 서점 안에 불을 켜지 않으면 상당히 어두웠다. 서점 앞으로 한 젊은 여자가 나왔고 여자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헤델은 때 마침 서점에 도착 했고 “로지”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로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상당히 반가운 미소를 뗬다.

“너무 오랜만이야. 헤델.”이라고 로지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로지.”

“테오는 아직 자고 있어. 요즘 아침잠이 많아졌지 뭐야. 아무튼 그보다 글을 쓰는 중인가? 아 참. 우선 들어와.”

 로지는 다행하게도 불을 붙이지 않았고 담배를 담뱃갑 안에 넣고는 헤델을 안내했다. 헤델은 우산을 접으며 가볍게 털고 로지를 따라 들어갔다. ‘4월의 서점’ 내부는 상당히 상쾌했다. 로지는 의자 위에 있던 종이봉투를 치우고 헤델에게 의자를 내밀고 “엊그제 홍차를 사 왔는데 괜찮더라고”하고 말하고 그녀는 헤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헤델은 앉은 채 고개를 돌려 내부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높은 책장들이 가지런히 서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책들은 테오가 원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4월의 서점에는 모든 책들이 소설로 가득했다. 다양한 장르의 소설이 즐비했고 소설이 아닌 다른 책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테오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소설 속에는 한 세계가 있었고 다양한 소설을 읽으면 다양한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소설의 매력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테오에겐 다양한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크게 다가왔다. 그만큼 많은 소설을 읽었고 자신이 읽은 소설로 자신의 방 책장을 채우다가 문득 서점 창업을 꿈꿨고 삼 년 전에 4월의 서점이 완성됐다. 여전히 그는 여러 소설을 읽고 자신이 꼭 읽은 책들로 서점을 꾸렸다. 처음엔 상업적으로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비판적인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오는 손님들은 자신이 읽고 싶어 하는 장르의 소설이 분명했고 반대로 ‘이번엔 어떤 걸 읽어볼까?’하는 손님들도 많았다. 테오는 손님들과 특히 대화를 많이 했고 관찰력이 뛰어나다 보니 손님들이 원하는 책들은 추천해주곤 했다. 단골도 많이 생겼고 우려하던 상황과 달리 생계를 별 어려움 없이 가꿔나갈 수 있었다.

 로지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홍차를 두 잔 내왔다. 로지의 왼손 약지 손가락에는 테오와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여기. 다른 홍차와 다르게 향이 조금 더 진해”

 헤델은 대답 대신 홍차를 받아 들었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로지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여기가 마지막 도착지야?”

“아니. 이번에는 제일 먼저 들렸어.”

“의외네? 장마 기간에 움직이려면 불편한 게 많겠는 걸?”

“그렇지 않아도 오는 동안 양말이 다 젖어버렸지 뭐야.”

 로지는 가볍게 웃고는 ‘테오에게 전화해볼게. 새로 들인 책들이 이번엔 꽤 많아 한번 둘러봐. 헤델.’ 말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헤델은 일어나 매년 오는 서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테오의 정리 습관 때문에 모든 책들은 가나다순으로 정렬되어 2권씩 꽂혀 있었고 첫 번째 책장에는 숫자부터 시작되었다. 아마 손님들을 위한 것도 있겠지만 자신이 책을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헤델은 천천히 둘러보았고 꽤 재미있는 제목을 발견했다.

ㅡ ’4월의 서점’

 책을 펼치자 저자의 이름으로 ‘마르크니 테오’가 적여 있었고 테오 스스로가 ‘나는 이때가 가장 멋 있었어’하는 사진이 헤델의 눈에 들어왔다. 서점의 작명은 테오가 아닌 로지가 지어주었다. 서점을 개업한 날이 사월도 아니었고 무슨 뜻이냐며 물어봤을 때 로지는 ‘음. 그냥 테오는 사월 같아. 그래서 테오의 서점이란 말이지’라는 대답을 남겼었다. 헤델은 테오가 글을 쓴 적이 없기에 의아해하며 또 사르륵하고 한 장, 두 장 계속해서 넘겼다.

 “단 번에 찾았네? 그 책 당신이 6개월 전쯤 머물고 갔을 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더니 두 달 전쯤에 완성됐었어.”

“재밌어 로지. 여기 내 이름도 나왔어.”하며 헤델은 즐거워했다. 헤델은 테오가 역시 뛰어나다고 여겼다. 그동안 소설의 열린 결말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테오의 상상력이 상당히 뛰어났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고 상상하는 것과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읽는다고 해서 잘 쓰는 것은 아니었다. 테오는 자신의 상상력을 상당히 글로 잘 풀어낸다고 생각했다.

“그게 마지막이야. 하는 동안 힘들었는지 ‘역시 난 읽는 게 더 좋아.’ 이러던 걸?” 로지는 테오의 특유 말버릇을 따라 했다. 헤델은 ‘계속 썼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테오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었고 테오와의 대화의 폭이 넓어질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는 어때? 맛있지?”

“응. 테오가 고르진 않았을 것 같군.”

 로지는 호호하고 웃으며 “테오도 곧 올 것 같아. 되게 반가워하는 투야.”라고 말하고 새로 들어온 책은 정리하기 시작했다.

테오는 부랴부랴 서점에 도착했다. 테오의 손에는 ‘4월의 서점’이란 책이 들려 있었다. 로지와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반지가 손에 끼워져 있었다. 육 개월 만에 테오의 머리스타일은 확연히 달려졌다. 검은 머리칼은 밝은 갈색으로 물들었고 이리저리 제멋대로 났던 수염은 온데간데없었다. 여전히 그는 트레이닝복을 즐겨 입었다.

“오랜만이야. 안 그래도 줄 것도 있었는데 말이야.”

“4월의 서점?”

  테오는 ‘엇’ 하고 탄식을 내뱉었고 눈빛은 “로지. 말하면 어떡해!”라고 하듯이 새침했다. 로지는 테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신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다.

“많은 책들 중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던걸?”

“정말?”하고 말하며 헤벌쭉하고 웃음이 번졌다.

“장난이야. 테오.”

 괜스레 장난을 치자 테오의 표정은 더욱 웃음이 번졌다. 로지를 포함해 세명은 서점 끄트머리에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로지는 헤델과 함께 마셨던 찻잔을 들고 개수대로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테오의 노트북과 초콜릿이 몇 개 놓여 있었고 빈 봉지도 몇 개가 보였다.

“잠깐 얼굴 보려고 들렸어 테오. 오늘 중으로 다시 떠날 생각이야.”

“매번 마지막에 들리더니 무슨 일이야?”

“딱히 별 다른 이유는 없어”

“그래. 점심은 먹고 갈 거지?”

 헤델은 고개를 끄덕였고 테오는 아까부터 들고 있던 ‘4월의 서점’을 건넸다. 둘은 대학생이 되면서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깊게 가까워졌다. 헤델과 테오는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축구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십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여전히 그 둘은 동아리에서 있었던 추억을 자주 이야기했다. 로지는 그들의 옛 추억 이야기를 들을 때면 “또 그 이야기야?”하며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추억이라고 한다면 헤델의 패스를 받고 테오가 골을 넣었는데 그것이 역전골이자 결승골이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그 둘에게는 자랑거리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닌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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