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반려는 모순적인 단어였다! 부정하고 거절하는 반려와, 평생을 약속하는 수용의 반려가 같은 발음이라니. 그래서 ‘반려’를 입에 올릴 때면 서글프기도, 포근하기도 했나 보다. 가만히 그 뜻을 매만지고 있자니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다. 거절의 반려는 숨이 붙어있는 한 수십 번, 수백 번 마주하겠지. 하지만 수용의 반려는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희귀성 이벤트다. 진심으로 반려하고자 하는 것을 만나는 것은 왜 그다지도 어려운가. 그런데도 잠깐의 수용으로 인간은 거절을 잊고 몇십 년을 살아가겠지. 아주 실없고도 굵직한 극복이다.
나 역시도 반려가 주는 실없는 극복으로 숨을 이어간다.
초등학교 3학년즈음 자주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놀러 오셨다. 하루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가, 내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셨다. 아주머니와 나는 아주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래서 반발심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그간 여기저기서 쌓인 감정이 터졌던 걸까? 눈물은 쭉쭉 흘렀고 엄마와 아주머니는 한참을 미안해하며 축축한 얼굴을 닦아주셨다.
어릴 적부터 생각은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흘렀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걱정했다. 염려하며, 혹은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로 ‘부정적인 생각 좀 그만하라’고 타이르시곤 했는데, 그런 말들이 오히려 나를 파먹었다. 나의 방식이 틀렸다고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나는 나 자신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옳지 않은 생각의 길을 품은 사람으로 여겼다. 오랜 시간 거절의 반려는 내 옆을 지켜왔다.
내가 나를 반려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행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나를 거절하고, 부정한다. 그건 점점 세상이 나를 반려하는 듯한 망상으로 이어진다. 세상이 온통 컴컴한 기분. 나는 반려가 드리우는 그림자의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직하게 곁을 지키는 반려로부터 도망쳐 쫓기듯 쥐구멍에 숨어들고 나면 내게 남은 공간은 시커멓고 좁은 한 칸의 방뿐이다.
그런데 반려를 밀어내고 무언가 손을 건넸다. 나는 빛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를 좁은 구멍으로 발을 딛고, 팔을 휘두르고, 얼굴을 내민다. 여전히 그곳에 반려가 있지만 나는 두 발 더 나아갔다. 단단히 잡은 손의 주인은 처음 보는 모습의 반려, 수용의 반려였다. 발 딛고 서는 것조차 힘겨워서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다채로운 수용의 반려를 만날 수 있었다. 수용이 주는 잠시간의 웃음, 그 순간으로 나는 거절의 반려를 버텨낼 수 있다.
수용의 반려는 익숙함으로 꽉 차 있었다. 늘 곁에 있었던 것이다. 의미 없는 감정의 배출인 줄 알았으나 애정이었고, 고장 난 마음인가 하였는데 그 또한 애정이었다. 그 애정은 나를 구성했고, 나를 움직이게 했고, 나를 나로 키워냈다. 나는 반려를 점점 수용했다. 나를 직시하는 시간 그리고 나를 이해하는 시간으로 세상이 점차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깨달아버린 애정에 기꺼이 평생을 약속할 것이다. 자음과 모음의 묶음으로 세상에 공표하는 거야. 너희가 선물한 실없는 극복으로 나는 나를 조금씩 반려하고 있다고. 이제 너희는 나의 일부, 나의 “반려”라고! 비록 너희가 나 자신이라도, 나는 너희가 참 좋다고!
그리하여 여러분께 반려 애(愛)-정혜원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애정-를 소개합니다.
여러분도 마음껏 거절하고 수용하며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기를.
마음껏 반려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