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김하진
절로 ㄷㄷ 떨리는 겨울. 출근길 뜨아가 절실한 2월이다.
작년 여름의 일이다. 점심시간에 회사 사람들과 카페에 갔다가 무더운 날씨에도 뜨아를 주문하는 나를 보고 막내가 잔망스럽게 말했다.
"대리님 (이 날씨에) 뜨아 드세요? 완전 핫걸이시네요."
추운 날에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포기하지 못하면 얼죽아, 더운 날에도 뜨거운아메리카노를 포기하지 못하면 핫걸, 핫보이가 되는 걸까. 검색해보니, 더운 날 뜨아를 시켜먹는 사람을 '쪄죽따(쪄 죽어도 따아)' 혹은 '뜨죽따(뜨거워 죽어도 따아)'라는데 어쩐지 억지스럽고 '얼죽아'보다 명쾌하지 않은 느낌이므로 나는 그냥 핫걸을 하기로 했다. 그날 이후로도, 여름-가을에 뜨아를 시키는 나를 보고 친구들이 놀라면 "난 핫걸이니까"하고, 막내가 그랬듯이 잔망스럽게 말해 웃겨주었다.
함께 카페에 간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하는 건 아아나 뜨아의 여부보다는 다른 메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메리카노를 시킨다는 일관성에 있다. 일 중엔 서로의 옆모습이나 모니터 너머 정수리만 겨우 보는 우리는 커피를 시키고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스몰토크를 시도하는데, 나의 일관된 메뉴 선정은 곧잘 대화 소재가 된다.
"늘 아메리카노만 드시네요."
"단 음료가 당기는 날은 없나요?"
어쩐지 인터뷰 같은 물음에 내 대답은 "있습니다."지만, 어쩐지 시럽 넣은 커피나 라테, 에이드류는 키오스크 속 사진이나 메뉴명만 봐도 이미 단맛이 느껴지는지라 입속에 퍼지는 허상의 단맛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스스로도 궁금해진다. 아아와 뜨아라는 두 갈래 길에서 나는 왜 뜨아인가? 궁상맞게 말하자면 카페 메뉴 중 뜨아가 가장 저렴하다. 아아는 얼음값 때문에라도 치사하게 몇백 원 더 붙지 않나. 하지만 통장 잔고가 아니라 내 기호를 근거로 말해보자면 경험상, 나는 카페인이 잘 받지 않는 몸이다. 더운날 목을 축이듯이 아이스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를 쫍! 빨면, 머지않아 심장이 빨리 뛰고 체한 듯 속이 불편해진다. 반면 뜨아는 어떤가. 뜨거운 것을 빨리 마시지 못하는 내게 뜨아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음미하고 후릅... 마셔야 하는 것이라 내 심장도 안정하고 커피 향과 따끈한 목 넘김을 오롯이 누릴 수 있다. 쫍!과 후릅... 이 의성어들은 내가 미처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어린 왕자의 상자 그림 같은 것이라 알아서들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아무튼 메뉴가 백여 개 씩이나 있는 카페에 가서 허구한날 아메리카노만 시키는 사람이니, 단 걸 안 좋아한다는 오해를 종종 받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제주 사람들 모두가 귤나무를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집에는 있어'와 같은, 증명하기 까다로운 것인데.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액상 과당만 멀리할 뿐, 카페에 가면 조각 케잌을 꼭 시키고 달에 한 번은 생크림과 초코칩을 추가한 와플을 시켜먹는 사람이다. 단 걸 좋아하는 것치고는 먹는 빈도가 적은가? 물론 자주 먹는 단 것도 있다. 바로 다크초콜릿.
다크초콜릿에 맛 들인 지는 일 년이 채 안 됐다. 어느날 갑자기 다크초콜릿 특유의 쌉쌀한 맛이 생각났고, 찾으러 편의점에 갔는데 매대에 있는 다크초콜릿은 원형 통에 든 82% 드림카카오뿐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미각으로 드림카카오 82%를 묘사하자면 쌉쌀한 첫맛 뒤에 밀크초콜릿 같은 단맛이 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익숙한 단맛이면 반가워야 하는데 왠지 아쉽게 느껴졌다. 넌 편의점에 단 하나 있는 다크초콜릿인데(다크초콜릿의 대표성을 띠어야 하는데) 이렇게 와리가리 한 맛이면 어떡하니. 써! 근데 달아. 애매하긴 해. 그런 맛.
그 뒤로 온오프라인 마트를 뒤적이며 몇 종의 다크초콜릿을 맛봤다. 카카오 99%! 소금이 들어가 짭짤한 것, 다크초콜릿이라면서 드림카카오 82%보다 단 것 등. 그중엔 다행히 내가 수긍할 수 있는 다크초콜릿의 맛도 있었다. 그 브랜드의 다크초콜릿을 한껏 사들인 뒤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나 집에서 책을 읽는 등 가만히 앉아 몰두해야 할 때 판 초콜릿 하나를 어릴 적 밀크초콜릿 먹듯이 끊김이 없이 먹었다. 다크초콜릿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맛을 크레파스 맛이라고 묘사하는데, 사실 다크초콜릿을 처음 먹었던 날 나도 그렇게 말했었다. 나중에야 커피 중에 제일 단 커피란 걸 알게 된 믹스커피를 처음 마신 날도 '이런 걸 대체 왜 마시는 거냐'며 몰이해한 얼굴을 했던 거 같다.
이제는 다크초콜릿 애호가가 된 사람으로 말하건대, 그 크레파스 같은 맛이 좋은 것이다. 혀가 아니라 치아가 반기는 맛이랄까. 입이 심심할 때 오독오독, 일거리나 일 준 사람을 씹지 못하니 아득바득 씹기 좋지 않은가. 킹콩이나 드래건이 되어 눈앞의 건물 하나를 우적대는 듯한 강인한 느낌을 준단 말이다. (카페인 각성 효과란 이런 걸까?) 무엇보다 코코아 함량이 높을수록 풍부하다는 항산화 성분이 다크초콜릿을 먹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간식을 먹으면서도 건강해지는 기분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중요한 감각이다.
하지만 뭐든 과하면 안 좋은 법. 회사에서 다크초콜릿 한 판을 오전 중에 몽땅 먹었던 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쫍! 빨아들였을 때처럼 속이 미식거렸다. 한 번씩 미식거림을 겪지 않으면 카페인을 안 받는 체질이란 걸 잊고 사는 까닭이다.
다크초콜릿도 쫍! 대신 후르릅... 그것이 핫걸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