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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PD May 22. 2023

1999년, 직업을 정할 때 생기는 심리적 저항

- 1999년 2월~6월 -


제대로 취업을 하기 전에, 나는 여러 가지 직업을 경험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99년 2월은  IMF의 여파로 취업의 문이 얼어 있었다.


당시 벤처기업들이 마구 생기면서 벤처붐이 일었는데, 흔히 말하는 ‘굶는과’ 출신인 나는, ‘아래하 한글'을 간신히 200타 넘기는 수준의 컴맹이었다. 대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내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천리안, 나우누리에 올라온 중소기업의 채용공고와 동사무소나 구청의 구인공고들을 매일 확인했다. 지금 친구들은 알기 힘든 ‘교차로’ 같은 지역 소식지의 취업란도 수시로 봤다. 그래서인지 희한한 곳도 많이 갔었다.


한 번은 출판사라고 되어 있는 곳에 이력서를 냈는데, 면접을 보라고 연락이 왔다. 동대문에서 대학로를 넘어가는 언덕즈음에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는데,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메고 들어갔다. 내 또래의 남자와 여자들 네댓 명이 회의실에 모여 있었고 다들 처음 만난 사람들인지 분위기는 서먹했다. 면접은 생략됐고 대리라는 여자가 들어와서는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오늘부터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이었는데, 방문 판매로 책을 팔아 오는 것을 보고 합격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책에 대한 교육과 판매 방법 등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강의를 받고 점심시간이 되어 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는데, 바로 집으로 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도라도 해봤으면 재밌는 경험이 됐을 것 같은데, 그때는 너무나 창피했다. 그런 곳에 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고,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취직은 계속 안되고 백수의 시간이 계속되자 조바심이 났다.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고 찾아가 보고 실망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갔다. 학습지 교사, 전화판매원을 며칠씩 경험해 보다가 간간히 주말에 막일을 뛰면서 용돈을 충당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졸업한 직후엔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일자리를 알아 보라 시던 아버지께서는, 4월이 되자 공장에라도 가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래 공장이라도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다면 월급을 받지 않아도 되니 기술을 가르쳐 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졸업하고 두 달 후, 이벤트 회사라는 곳에 가서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신설동에 있는 오래된 건물의 사무실에 내 또래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왔었던 기억이 있다. 양복을 빼입은 남자 한 명은 키는 작았지만, 탄탄한 몸에 올백 머리였고, 말을 엄청 잘했다. 그리고 하늘하늘한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던 예쁘장한 여자는 누가 봐도 MBTI ‘I’ 성향이었다. 둘 다 이런 곳과는 안 어울리는 옷차림과 인물들이다. 지방국립대를 나온 나와는 달리, 서울의 대학을 나온 둘은 나보다 스펙이 좋아서 왜 왔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시켜만 주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사실 그곳은 이름만 이벤트 회사지 약을 팔던 곳이었다.


업무는 대략 이렇다. 과장이라는 사람이 학교 자모회나 산악회, 부녀회 등 각 단체 회장들 연락처가 있는 ‘소스’를 나눠주면 전화를 해서 단체로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접촉을 한다. 여행코스도 짜주고 경비도 우리가 모두 대고 회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재밌는 여행을 보내드리겠다고 한 후, 행사 당일 돌아오는 길에 홍삼 판매소에 버스를 대고 약을 파는 식이다. 기본급 10만 원에 나머지는 모두 ‘약’ 개수당 2~3만 원인가를 수당으로 받았다. 지금도 이런 식의 판매가 이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같이 일을 시작한 동기 남자직원은 넉살이 좋아서 업무에 금방 적응하고 일도 꽤 잘했다. 호감 가는 얼굴에 노래도 잘하고 놀기 좋아하는 그의 성향에 딱 맞는 일인 듯했다. 동기 여자직원도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사무실에 나오며 전화를 했고 행사를 잡았다. 난 아직도 그 친구가 관광버스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게 상상이 안 간다.


당시, 나는 전화하는 것이 두려웠다. 모르는 사람에게 아쉬운 말을 해야 하고, 부탁을 하고 설득을 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루는 자모회 총무님이라는 분께 전화로 속리산에 좋은 유원지가 있으니 가자고 했는데, 나보고 가봤냐고 되묻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가보지도 않은 곳을 추천하는 것이냐며 프로의식이 부족하다며 비아냥 거렸다. 거절을 하기 위해 뭐라도 꼬투리를 잡은 것인데, 너무 맞는 말이라 대응하지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끊은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업무 전화에 대한 불안감이 남아있다. 옆에서 누가 내 전화내용을 듣고는 비난하진 않을지, 상대방은 내가 말은 못 하고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할지는 않을지… 이것도 일종의 트라우마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어찌어찌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동안 2개 정도의 행사를 뛰었다. 물론 과장이라는 분이 모두 동행해 주었고, 버스 안에서 어머님들을 즐겁게 해 드리는 이벤트를 포함해 약 판매소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분위기를 업 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야지 약이 많이 팔렸다. 몇 번 같이 나가보니 사실 그의 레퍼토리도 매번 반복됐다. 버스에 타자마자 술을 돌리고 ‘시보야’, ‘밤이면 밤마다’ 등 정해진 노래와 멘트에 똑같은 춤을 추어댔다. 그렇게 신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돌아오는 차 안에 약상자를 하나씩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님과 할머님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과장이라는 사람의 그 당시 평균 월급이 대략 300만 원 정도였던걸 생각해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수입이었다. 물론 나의 첫 달 월급은 3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두 달째에 나도 그 일에 적응하게 됐다.


키가 크고 마른 탓에 어머님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았다. 버스 안에서 노래도 하고 유원지에 있는 나이트에서 춤도 추고 하면서 팁을 받는 날도 많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고했다며 10만 원씩 꽂아주는 총무나 회장님들이 생겼고 약도 제법 많이 팔리게 되자 둘째 달엔 150만 원 가까운 돈을 받게 됐다.  

행사가 끝나고 차나 술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접근하는 분도 있었지만 절대 가지 않았다. 일단 나보다 나이가 10살 이상씩은 많았고 그렇게 얽히는 게 유쾌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 무얼 알고 언제 봤다고 차를 마신다는 건가…


그렇게 석 달째가 됐을 때, 약을 팔아먹고살던 사람들의 전국 협회에서 단합대회를 열었다. 뭐 이런 협회도 다 있을까 싶지만, 우리나라에서 업종을 이루고 몇 사람이라도 공통의 일을 한다면 협회는 반드시 생긴다.


포천으로 넘어가는 유원지에 지역별로 수백 명이 모여서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업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단합을 도모하는 자리였다. 그때 타 지역에서 온 누군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40이 넘은 나이에도 이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한탄하고 있었다. 비전도 없고 누군가에게 떳떳하게 직업을 말할 수도 없는 이 일이 싫다고도 했다. 기회만 있다면 다른 떳떳한 일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훨씬 젊은 나에게 아직 늦지 않았으니 더 시간을 끌지 말고 일을 그만두라고 했다.  

대학교 2학년때까지 주말에 종종 막일을 했었는데 그때 만난 30대 아저씨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취업이 잘 안돼서 당장 돈이 필요해 한 번 두 번 막일을 하다 보니 지금까지 계속하게 되었다는 했다. 나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그 후로는 막일 알바도 잘 가지 않았었다.


아무튼 야유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의 미래와 현재와의 타협, 5년 후, 10년 후에도 이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 봤다.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줌마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행사를 잡고 관광버스에서 춤을 추며 팁을 받는 삶을 떠올렸다. 그런 삶은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마음속 저항이 너무 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협회의 단합대회가 나에게 미래를 직시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야유회가 끝난 며칠 후 그 생활을 정리했다.


지금의 나는 직업에 대한 귀천을 의식하지 않는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최선을 다하는 의지가 있다면 멋있어 보인다. 하지만 남들이 다 우러러보는 직업을 갖고 있다 해도 본인이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일을 대충대충 하는 사람들은 찐따 같아 보인다. 당시 접했던 ‘약’을 파는 일도 프로의식을 갖고 했을 수도 있다. 철저히 자기 기준을 정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더불어 나의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심리적 저항선을 갖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할 수 없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예를 들면 전라도 사람들이 국민의 힘을 지지하거나 대구경북 사람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건 대체로 불가능한 일이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양당이 정책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도 딱히 없지만 그게 그 사람들의 심리적 저항선인 것이다. 일본사람들 한 명 한 명과는 친하게 지낼 수 있어도 국가대 국가로 일본을 대할 때면 적대적이 되는 것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저항선이다.   

그 당시 나의 직업에 대한 저항선은 거기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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