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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Jan 20. 2022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편안함이 있으면 또 어디선가 그만큼의 불편함이 나온다.

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렇게 생각한다고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가끔 이 말을 신뢰한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모든 것이 생각 같지 않고, 모든 것이 불리할 때 이 말은 특히 더 항생제나 소염제, 혹은 진통제 같은 역할을 한다. 약효가 떨어지면 곪을 곳은 다시 곪고, 염증은 원래 그대로이고, 아픈 곳은 또 다시 아프겠지만 이것이 굳어져 계속되다보면 혹시 치유되지 않을까.


각설하고, 일체유심조는 불교 화엄경華嚴經의 중심사상이다. 그럼 또 화엄경은 무엇이냐? 화엄경의 원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인데, 이름처럼 크고 방정方正하고 넓은 이치를 깨달은 부처님의 꽃같이 장엄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이 일체유심조가 아주 유명해져 경주慶州의 지가紙價를 올리게 된 것은 이로 인해 중국 유학길까지 포기한 원효元曉 때문이다. 때는 신라 문무왕 1년인 서기 661년, 원효는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의상과 함께 두 번째 시도하는 당나라 유학길이었다. 10년 전에도 원효는 당나라로 가기 위해 의상과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다가 고구려 경계병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원효는 당항성(黨項城, 신라시대 당나라와 왕래하는 중요한 교통지, 현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당성이라고도 한다.)에 이르러 어느 무덤(동굴이라는 설도 있다.) 앞에서 잠을 잤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잠결에 달게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이에 원효는 정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경주로 돌아왔다. 그럼 의상은?, 의상은 원효와 달리 그대로 당나라로 불법(不法이 아닌 佛法이다.) 유학을 떠나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2조인 지엄智儼으로부터 8년간 화엄을 공부하고 돌아와(당나라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돌아왔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다시한번 각설하고, 얼마전 ‘꼭 원목의 독서대가 필요했을까’라는 글에 “이제 나의 명창정궤明窓淨机를 꿈꾸는 작은 서재는 독서대만큼 기품 있고, 독서대만큼 고고해져 더욱 서재다워질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독서대를 놓으니 초록은 동색草綠同色이라 같은 원목의 독서대와 책상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고, 독서대에 책을 고정해 놓고 읽으니 두 손이 편하고, 독서 자세가 곧아져 올해 한 일 중 잘한 일중 하나로 꼽을만했다.”라고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독서대를 사용하다보니 한 가지 불편함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자주 책을 고정하고 있던 경첩을 재껴 책장을 넘기고 다시 고정해야하는 번거로움이었다. ‘아, 모든 것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편안함이 있으면 또 어디선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불편함이 나오는구나!’ 하지만 이 정도쯤의 불편함이야 감수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날 책을 읽다가 문득 일체유심조가 생각났다. 독서라는 것이 어떨 때는 “안광眼光이 지의 배를 투하고 철”할 정도로 몰입하는 행위여야 하는 것이거늘, 책장을 넘기는 일이 번거로운 일이 되도록 바삐 책장을 넘겨서야 되겠는가? 모름지기 책읽기가 모래 속에서 보석을 찾듯 꼼꼼히 살피고, 눈 아래 묻힌 봄꽃을 찾듯 보이지 않는 행간의 뜻을 찾아 읽는 것이라면, 독서대의 경첩을 재끼고, 책장을 넘기고, 다시 경첩을 제자리로 되돌려 책을 고정하는 것은 불편하고 불필요한 행위가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니 독서대는 천천히 뜻을 새겨 읽고, 그것을 또 음미하고 곱씹으며 읽고,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시간을 가지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번거로운 과정들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돈오頓悟, 갑자기 깨달음이 찾아오자 불편함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 행위들이 의식儀式처럼 경건해졌다. 일체유심조보살 마하살.


 ※일체유심조 : 화엄경의 중심 사상으로, 일체의 제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곧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는 것인데, 실차난타가 번역한 ‘80화엄경’ 보살설게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온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거불·현재불·미래불 삼세 일체의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하라(應觀法界性).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一切唯心造)(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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