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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Feb 22. 2024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

짧게 읽었으나 여운이 길었고, 얇았으나 두껍고 무거워 전혀 사소하지 않은

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접하게 된 것은 겨울 하노이, 꺼우저이에 있는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하다가였다. 나는 그때까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물론, 키건, 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휴대폰 메모 파일에 키건의 책 두 권, ‘맡겨진 소녀(foster)’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을 기록해 두었다. 각각 ‘살 책들’ 62번과 63번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1주일이 지난 토요일 오후 나는 이 책 두 권과 친구 이지상의 지리지地理誌 ‘포천’ 그리고 배명은의 소설 ‘수상한 한의원’을 ‘yes24’에서 주문했다. -내가 토요일인 주말에 책을 주문하는 이유는 이 온라인 서점에서는 주말에 책을 주문하면 주말 상품권 1,000원을 제공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이날은 설날이었고, 설날이 되어도 고향을 가지 않은 지가 이미 수년이 되어 만날 사람도 특별히 할 일도 없는 날이었다.


책들은 사흘 뒤 예정보다 하루 일찍 현관문 앞에 배달되었고, 아내가 그것을 내 서재 책상 위(혹은 거실 식탁 위였는지도 모르겠다.)에 올려놓았다. 퇴근 후 책을 포장한 상자를 조심스럽게 뜯어 책들을 확인했다. 두 권의 책은 두께가 매우 얇았고, 다른 두 권의 책은 크기가 무척 작았다. A5판 크기의 두께가 얇은 두 권의 책이 키건의 책이었는데(각각 16쇄와 15쇄였다.), 두 권 모두 옮긴이의 글까지 131쪽과 103쪽에 불과했고, 내가 이 책들을 산 이유이기도 했다. 곧 있을 베트남 출장 때 하노이의 사무실에서 아주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하지만 내가 이 책을 꺼내 읽게 된 것은 14일 오후 판교에 있는 사무실에서였다.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독서기讀書記 원고를 마무리해 막 블로그에 올리고 난 후였다. 하노이에서 읽을 책으로는 오랫동안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 있던 허먼 멜빌의 ‘모비 딕’과 서재 책꽂이에서 언제나일까?, 손길을 기다리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적당할 것이었다. 두 권 다 목침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두께가 두꺼웠고, 내용도 웬만한 끈기로는 버티지 못할 만큼 지루해서(몇 번이나 읽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책들이었다.) 하노이에서의 시간을 충분히 버텨줄 것이라 생각했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첫 문장이다. 옮긴이가 키건에게 번역의 조언을 구했을 때 키건은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몇 번이나 첫 문장을 다시 읽으며 이 단어들과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의 이미지를 연결시켜 보려 했으나, 종내 이들의 연결된 이미지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라고 하는 작가의 문장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이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카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는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희생된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었다. 그만큼 책은 나에게 덤덤하고 사소하며 무미하게 읽혔다. 책 중간 어디쯤 작가가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알아챘을 때조차도 나는 그녀들의 거대한 아픔을 알지 못했고, 책이 의도하는 바 또한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단지, 모두가 침묵해서 작은 정의조차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내 망설임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다- 을 끝낸 ‘펄롱’이 창고에서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와 침묵했던 사람들 사이를 걷는 모습에 조용히 박수를 쳐주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짧게 읽었으나 여운이 길었고, 얇았으나 두껍고 무거운 ‘전혀 사소하지 않은’ 책이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은 2022년 소설부문 오웰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소설로 알려져 있다.- “아름답고 명료하며 실리적인 소설”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물론, 부커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18세기부터 운영된 ‘막달레나 세탁소’는 1996년에야 마지막 세탁소가 문을 닫았다. 이 시설에서 은폐·감금·강제 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적게 잡으면 1만 명이고, 3만 명이 더 정확한 수치일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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