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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 Nov 21. 2020

가장 빛나는 나이, 나의 서른

조금 가혹한 그러나 가장 사랑스러운 나의 서른에 대하여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나이 서른. 세상은 서른에게 가혹하다. 취업, 승진, 결혼, 무릇 서른 줄이 되면 가정을 꾸려야 하고 사회에서도 자리를 잡고 인정을 받아야 하며 더 이상 철없는 소리도 그만해야 하는 이른바 ‘나잇값’을 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스물아홉까지 없었던 철을 한 번에 들이켜야 한달까.

그뿐인가, 서른은 가치 폭락의 시기이다. -라고들 한다- 더 이상 청춘이 제공하는 젊음과 아름다움, 넘치던 체력은 패시브 스킬이 아니며 무릎이던 허리던 어디 하나 아픈 곳이 디폴트 값, 늘어나는 주름살이 옵션이 된다. 무상으로 누리던 가치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관리하고 신경 쓸 것들이 많아진다.

“평균 수명 80세, 100세 시대! 인생의 1/3에도 해당이 안 되는 초반일 뿐인데 서른이 뭐가 어때서? “라고 부정해왔으나, 나 또한 서른은 불편했다. 속했던 모든 단체의 족보를 꼬이게 만들었던 빠른 년생으로서, 늘 남보다 1년 어린 삶을 누려왔음에도 계란 한 판이 된 나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린이 (서른+어린이) 혹은 스물열 살을 외치며 어떻게든 20대의 청량함을 유지해보고자 그릇된 노력을 하고 있지 않던가.




빛나는 것들을 떠올려보자. 새로운 것은 대부분 빛난다. 갓 태어난 생명과 이제 막 움튼 새싹이 그렇고, 처음 걸음마를 뗀 아이와 그 광경을 마주한 부모의 감동에 가득 찬 눈빛이 그렇다. 첫사랑의 떨림은 풋사랑으로 끝날지언정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처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빛나는 이유가 된다. 처음 떠나는 여행, 처음 만나는 사람, 처음 맡아본 향기, 처음 듣게 된 음악, 우리가 경험한 대부분의 새로운 것들은 빛이 난다.

꼭 새로운 것만이 빛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낡아있는 것에도 감동하니까. 백발의 노인에게서 풍기는 초월적인 느낌. 개인과 국가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간직한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 수 세기를 거쳐 사랑받는 음악과 미술품 그리고 이야기들까지, 무릇 낡아 가치를 잃었대야 마땅한 시간 동안 빛나고 있는 무언가에 경이로움마저 느낀다.

어쩌면 ‘시작의 순간부터 빛날 수 있는 명분이 주어진 것들’과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낸 것들’ 그 어느 쪽에도 서른은 속하지 않는다. 새싹이 움틀 때의 싱그러움과 열매를 맺고 꽃이 피어날 때의 아름다운 순간, 서른은 그 어드메에 있을 뿐이다.





서른이 빛나지 않는다는 바보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다. 모든 빛나는 순간들이 모인 끝자락에서 또 다른 명분이 탄생하는 거라면, 나의 서른은 아무래도 빛나니까. 신경 쓸 것이 많아진 것은 신경 쓸 여력이 많아졌기 때문이리라. 가혹한 선택들도, 줄어드는 체력도, 모름지기 당연하다 생각해온 것들에 감사하며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일 뿐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는 없는 거다. 젊음의 제조일자는 태어난 순간 정해져 있고 그 유통기한은 짧다 하더라도, 어른의 제조일자는 저마다 다르다. 적당히 때 묻고 적당히 계산적이며 청춘의 설렘은 없어도 생각이 무르익어가는 나의 서른. 나는 나의 서른을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하려 한다.

노랗게 빨갛게 때로는 초록빛으로, 다양한 색으로 채워진 인생의 순간들이 더 멋지다. 조금은 재미없고 조금은 멋이 없고 조금은 구차하고 부끄러운 조각들도 한 데 모아 놓으면 아름답다.

조금은 가혹한 나이 서른. 그러나 가장 사랑스러운 나의 서른.

빛나는 오늘을 기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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