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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eelike Nov 30. 2020

숙제를 다 한 학생처럼

요즘 저녁에는 TV를 본다. 책이나 컴퓨터를 보는 것보다는 눈이 덜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쉬고 싶어서이다. 금요일 밤에도 쉬면서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봤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스타트업이다. 드라마 기본정보 소개에 의하면 ‘한국의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을 꿈꾸며 스타트업에 뛰어든 청춘들의 시작(START)과 성장(UP)을 그린 드라마’라고 한다. “금요일 밤이니 늦게까지 봅시다.” 하며 남편과 함께 여러 편을 몰아서 봤다.      


드라마 이야기다.

여자 주인공 서달미(배수지)가 일 때문에 가평에 갔다가 돌아올 차편이 없어 고생하고 있을 때다. 한지평(김선호)이라는 남자가 차를 타고 지나가다 우연히 서달미를 만나 달미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돌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사실은 우연이 아니고 그 남자는 서달미를 데려오려고 일부러 그곳에 간 것이었다. 

- 타요
- 여기는 어떻게?
- 아, 마침 내가 여기 일이 있어서.
- 근데 진짜 이 근처에는 무슨 일이에요?
- 워낙 자주 와요.
- 가평에 자주 올 일이 뭐가 있어요?

남자는 무슨 말을 할까 궁리하다가 찻길 옆에 가평 '잣 칼국수'를 선전하는 표지판을 보고는 말한다. 

- 아, 내가 잣 칼국수를 워낙 좋아하거든요. 매주 와요, 가평은 잣 칼국수거든요.     


그 장면을 보고 남편이 묻는다. 

- 우리 내일 잣 칼국수 먹으러 갈까?

- 그럽시다.


토요일 아침, 가평 잣 칼국수를 검색했다. 검색하니 잣국수도 있다. 만화가 허영만의 백반 기행에 나왔다는 집을 차를 타고 1시간 반이나 걸려 찾아갔다. 진한 잣죽을 생각하며 갔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하기야 잣을 많이 먹으면 기름이 너무 많아 소화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맛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터다. 잣국수, 감자전, 도토리묵을 하나씩 시켜 나눠 먹었다. 먼 길을 가서 소박한 음식을 먹었다. 요즘은 소화가 잘되는 소박한 음식이 점점 더 좋아진다. 다녀오고 나서야 음식 사진을 찍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여기에 사진도 올릴 수 있을 텐데.      


같은 드라마를 보더라도 기억에 남는 부분을 각자가 다를 것이다. 드라마를 보며 삶에 대한 통찰을 얻더라도 그 부분은 각자 다를 것이고, 가보고 싶은 드라마 속의 장소도 다를 것이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음식을 보고 그 음식을 먹으러 찾아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경험하고 싶다고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니까 기분이 좋다. 


50대 후반으로 가는 지금 이 나이가 되니까 좋은 것 중 하나는 다시 내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직은 몸이 움직이지 못할 만큼 늙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시간이 내 인생의 황금기 같기도 하다. 숙제를 다 한 학생처럼 홀가분하다. 여전히 공부는 더 해야 하겠지만, 최소한의 숙제는 했다. 이런 시간이 생긴  것이 감사하다. 이렇게 내 반경을 넓혀가며 내 세계를 확장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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