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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May 18. 2023

#3 403호는 속이 타고 201호는 말이 없다(3)

드디어 201호가 업체에 통보했던 답변기한이 도래했다. 그날 저녁엔 아침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공지사항이 붙어있었다. 


"기존 업체가 계약서 작성을 거부함에 따라 현시점부로 계약을 종료합니다. 이번 달 관리비를 선납하신 분들께서는 업체에 연락하시어 환불받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세대 간 카톡방을 만들어 신규 업체 섭외 등 안건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그야말로 일잘러의 보고서 머리말과 같은 막힘없는 공지사항이었다. 계약의 종료시점은 일(日) 단위로 명시되어 있었고, 환급받을 세대를 위해 기존업체의 연락처도 추가로 적혀있었다. 다만 마지막 문장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직 입주자 대표를 희망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제가 임시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표를 희망하시는 분은 의사를 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띵-동 소리가 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의문이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입주자 대표라니, 그리고 임시대표라니, 희망자는 의사를 표명하라니.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의아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입주자 동의를 얻어 업체를 변경하기로 했으면 그대로 진행하면 될 일이다. 업체 변경이 확정된 마당에 이제 와서 입주자 대표를 뽑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입주자 대표를 뽑아야 한다면 업체 변경 전에 선출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업체 변경의 필요성을 주창한 것도, 그 과정을 주도한 것도, 그리고 업체에 계약종료를 통보한 것도 201호였다. 그런 와중에 굳이 자신을 '임시'대표라고 강조한 것이 영 개운치 않았다. 본인이 주도한 이 사태에 대해 뭔가 책임감 있는 자세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입주자 대표라는 직함을 만들어서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짐을 넘기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셋째, 201호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입주자 대표를 뽑자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 희망찼던 입주자 회의는 열리지 않았고, 업체 변경에 찬성표를 던진 세대도 201호를 포함해 4세대에 불과했다. 심지어 업체 변경에 대해 의견을 내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한 세대도 있었다. 16세대 중 12세대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 201호의 문장에선 마치 수도권 알짜배기 선거구의 재보궐 선거처럼 표현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빌라 거주자의 대부분은 전세로 계약한 단기 거주자들이다. 입주자들은 대부분 길어야 2년, 짧으면 1년을 살 것이다. 당장 나부터 올해 말에 이사를 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입주자 대표 선정이라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나만 세입자고 나머지는 모두 자가 입주자인가 생각해 봤지만 부동산 앱에서 최근 확인한 매물만 3건이었다. 입주자 의견 중에는 무려 '엊그제' 이사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마당에 입주자 대표를 뽑자는 201호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찝찝한 마음을 거둘 길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의아함은 해결되지 않은 가려움으로 남았다. 201호가 남긴 공지 끝에는 QR코드가 있었다. 추후에도 입주자들의 의견을 계속 받을 것이니 의문사항은 QR코드를 통해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입주자 카톡방이 있으면 참여하겠다는 메시지와 전화번호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나는 입주자 카톡방에 초대되었다. 201호가 첫 번째 방을 붙인 지 2주가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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