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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by 현묵


어떤 순간들은 이름 없이 흘러가고, 어떤 감정들은 특별한 의미 없이 스며듭니다. 그것들은 때로 한낮의 따뜻한 볕처럼, 혹은 저녁에 살랑이는 바람처럼 존재할 뿐이지요. 우리는 늘 무언가를 찾으려 합니다. 의미를 붙이고, 가치를 증명하며, 어떤 순간이 특별하게 여겨져야 할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어느 날, 창가에 앉아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바라보았습니다. 구름은 묵묵히 조금 더디게 흘렀고, 바람은 잔잔히 사람들의 뺨을 가볍게 쥐곤 제갈길을 가는 듯했습니다. 제가 그 순간을 꼭 기억해야 할 이유도, 무언가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살다 보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는 대개 무엇이라도 열심을 다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하루를 계획하고, 목표를 세우고,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조급함 속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가장 마음이 편안하고 의미 있던 순간들은 어떤 의미를 고민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인 시간이었습니다. 의미 없이 친구와 길을 걸으며 실없는 농담에 웃는 순간,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던 순간, 손에 잡히는 대로 책장을 넘기다 잠이 들었던 밤들. 특별한 목적 없이 지냈던 그런 달큰한 물 같은 순간들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고, 돌이켜보아야 그때 제법 좋았구나라고 되짚습니다.


관계도 그렇습니다.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가끔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순간이 있습니다. 말없이 함께 앉아 서로를 바라보면 웃음 짓거나, 긴 하루 끝에 조용히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지요. 사랑이란 꼭 스며들듯 함께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의미 없는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을 만지작거리고, 무릎에 대롱대롱 흙을 달고선 놀이터를 뛰 다니고, 문방구에서 간식거리를 손에 쥐며 한참의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손에 잡히는 돌멩이를 주워 괜히 주머니에 넣어 두기도 했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순간들은 하나하나가 조각처럼 남아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시간들이 결국 저를 이루는 것들이겠지요.


지금은 몸이 부쩍 커버려 흙놀이를 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내도 괜찮겠지요. 창밖을 바라보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손에 잡히는 책을 꺼내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면 더 좋을 겁니다. 이렇게 흘려보낸 시간을 적어보니 퍽이나 위안이 되는 걸 느낍니다.


가끔은 모든 걸 내려놓고 아무것도 아닌 날이 있어도 좋겠습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나는 산책, 우연히 마주친 고양이에게 지어주는 이름, 손끝에 닿은 커피잔의 매끄러움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온전히 다가올 수 있게요. 그러니 어느 화창한 봄날이 꽃과 살랑이는 바람과 조금 떠들썩함이 있던, 그저 무용한 하루가 되길 바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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