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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묵 Jan 02. 2023

나는 악필이다.

적어도 종이는 뚫을 줄 아는

나는 악필이다.

그 이유도 별로 대수롭지 않다.

유치원에서 글씨 연습을 위해 숙제로 주어진, 내 몸통만 한 글씨 연습 노트에 단어의 한 획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혼자서 게임을 하는 것처럼 휘갈긴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 머리맡에서 팔짱을 끼고 쳐다보시던 아버지의 힘찬 꿀밤이 그 마저도 나를 멈추게 했다.


욘석아. 내가 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제대로 하지 못해!

사실 그 당시 '미운 X살'이라는 표현이 나를 정확히 대변할 만큼 악동의 에너지가 넘쳐흐르곤 했다.

아마 내가 그때 아버지라고 한들 꿀밤 말고는 당할 재간이 없었을 터이다.

막론하고, 그 이후로 나는 글씨에 연이 없다 여기며 늘 되는대로 글을 휘갈겼다.

학창 시절, 급한 마음에 글씨를 마구 휘날리면 다음 날 감쪽같이 제 글씨도 못 알아보곤 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논술 수업을 들을 기회가 생겼는데

OT에서 글씨에 대한 논술 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여러분,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불러서 멈춰 세웠어요.
그게 개그맨이었으면 좋겠어요. 원빈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시 명문대학교지만 철학과를 나와서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던 논술 선생님의 입담은

하루 종일 수업을 듣던 고등학생들도 저녁시간에 열의에 차게 할 만큼 열정적이었고, 창의적이었다.

십 수년이 지난 일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저 말만큼은 내 기억 속에 있었다.

어쩌면 나에게 글은 떼어낼 수 없는 어떤 게 될 거라고 직감했던 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나는 논술 전형으로 대학교에 입시원서를 넣지 않았고, 다시 글씨는 잊혀 갔다.

다행히 이때에 조금 고쳐진 글씨는 '나도 못 알아볼 정도'에서 '나는 알아볼 정도'로 고쳐졌다.


그 후로 대학교에선 글씨와 통 인연이 없었다. 가끔 동아리 홍보에 필요한 대자보를 쓰거나 전공 수업을 들으며 필기를 할 때에나 글씨를 쓰곤 했다. 대학교에서 만나는 사람이 늘어난 만큼 입담도 늘어서 형식이 아니라 본질을 봐달라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렇게 늘어놓은 변명을 징검다리 삼아 세월을 건넜고, 군대에 갔다.

21살,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된 나이다. 군대에서도 그때 유행하던 SNS로 쉽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친구들과 가족에게 정성을 들여 편지를 쓰며 답장을 기다리는 낙으로 이등병의 하루를 견디곤 했다. 몇 통의 손 편지를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글씨를 썼다. 처음으로 편지를 쓰는 친구에게 잘 지내냐는 편지의 상투적인 인사말 대신 늘 첫인상을 적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던 게 기억난다.


당시 사랑이 인생의 최고 가치라 생각하던 나에게 편지란 그야말로 사랑의 매개체였다. 전화나 대면에서는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하긴 부끄러웠고 말이다. 편지를 쓰는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내 글씨를 다시 되돌아보았다. 괴발개발까지는 아니더라도 빠르게 적으면 '나만 알아보는 글씨'에서 벗어나긴 어려웠다. 군대에서 따로 글씨를 연습하기는 어려워 길러진 악력으로 흔들리는 글씨를 잡기 위해 악착같이 펜을 쥐었다. 이따금 글씨에 종이가 뚫리기도 했었는데, 나의 근육에 찬사를 보내고 뇌는 한탄할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의 악필을 이기기 위해 용을 썼다.


사랑은 본질이 중요하더라도 형식이 엉망이면
채 열어보기도 전에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해서 말이다.

이때의 편지는 가족과 친구에게 보내는 나의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고 있었지만, 애달프지는 않았다. 함께 했던 좋은 날들을 군대에 옴으로써 더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고, 고마움이었으며, 추억 그 자체에 보내는 나의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편지가 사랑이었던 까닭은 뒤늦게 알게 된 친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나는 세상을 안다고 호언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몰랐다. 내 글씨는 종이를 뚫을 순 있었어도, 동반자가 있는 사람의 마음을 뚫어내고 싶진 않았다. 동반자가 있는 걸 알았을 때에는 다이어리에 100장은 채워버린 나의 편지가 책이 되어버렸을 때였다. A5 크기의 굵은 다이어리는 내 글씨의 뚫어냄을 견디고 책이 되었지만, 청춘이 되지는 못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이미 20대에 한 사람에게만 책을 낸 적이 있는 작가로 살아간 셈이다.


전역을 하고 자연스럽게 편지지를 마구 뚫어대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사랑은 중요하다고 외치며 그것에 나부끼며 살아갔다. 그렇게 사랑에 가볍게 흔들리면서도, 글씨를 쓸 때면 굳게 쥐었던 펜처럼 마음을 다잡았다. 청춘의 파고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들이치는 것 같을 때에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글씨를 뚫어내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떠나보내었다. 그렇게 가볍게 흔들리면서도 종이를 뚫었다. 그래도 떠나갈 사람은 떠나갔다. 빈자리를 글씨로 채우는 게 글을 좋아하는 사람의 업보로 느껴졌다.


사람은 떠나고 나에겐 뚫린 종이만 남았다.
그래서 아직 사람의 마음을 뚫는 글씨를 쓸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뚫리고 구겨진 종이만 내 곁에 있는 것이, 꼭 내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뚫린 듯 구멍이 났으니 뭐라도 붙여 놓아서 막아야 했다. 그 무렵부터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햇수로 몇 년인가 동안에 뚫린 마음에 나의 글씨를 박아 넣었다. 못나게 휘갈기고 눌러쓴 글씨들이 마음에 인이 박이는 듯했다. 나는 악필이다.

내 글씨가 못나보였다. 종이나 뚫어대던 글씨가 못내 미웠다.


그렇게 돌고 돌아 브런치에 오고,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가볍게 적으려던 글의 내용이 세월 먹은 몸처럼 무거워진 셈이다. 악필인 것을 보여주려 찍어 놓은 글들은 지워버렸다. 이미 내가 악필인 것은 상관없게 돼 버린 셈이다. 인이 박인 글씨들은 다시 무엇인가의 사랑으로 교정이 될 거니까. 사실 이렇게 글을 적는 게 조금 겁이 난다. 아직도 나의 글씨는 종이나 뚫어 내는 것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뭐, 아무렴 어떤가. 글을 쓴다는 사실 만으로도 인이 박힌 내 마음이 뚫리는데 말이다. 나는, 아직은 악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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