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묵 Jan 14. 2023

악동의 기억

생애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아무도 물어보는 사람은 없지만 이것저것 의미 붙이기 좋아하는 나에게 이 질문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악동의 피가 흐르게 된 이유이자 변명거리이기 때문이다.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는, 대충 서너 살 즈음은 됐을까 싶을 때다.


생애 최초의 기억은 어두컴컴한 민박집 마당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 흐릿한 조명을 사이로 낮은 불판에서 고기를 굽고 왁자지껄 하는 그런 장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막걸리를 종이컵에 부어 마실 때 나는 종이컵에 담긴 막걸리를 요구르트로 착각해 시원하게 마셔버린다. 아이가 있다면 종이컵에 똑같이 생긴 요구르트와 막걸리를 담아서 놔두지 않을 텐데. 부모님은 별 의식 없이 놔두셨고 나는 그렇게 어릴 때 종이컵에 담긴 막걸리로 정신을 잃었다. 아직도 아른 거리는 그 장면과 분위기는 내 몸에 악동의 피가 흐를 거라고 누군가 예견하고 기억에 박아 넣은 걸까. 주변에서 누군가 '아이고 저 녀석 막걸리를 마셨네!'라고 말하며 술에 취한 어른들이 손뼉 치며 웃거나 했다. 하지만 이후로 내 기억은 수년동안 막걸리 때문에 껌껌해졌다.


그 후 생애 두 번째 기억은 대여섯 살에 엄마를 따라 목욕탕에 간 기억이다. 그때 목욕탕에서의 기억은 우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거다. 목욕탕의 미닫이 문을 열면 미지근한 물이 담긴 우물이 있었다. 동그랗고 턱이 낮아 오며 가며 쉽게 발이나 씻으라는 용도에서 만들어 놓은 게 분명 한대. 나는 그곳에 어쩌다 홀리듯 들어가 꼬르륵거렸다. 아주 낮은 턱이지만 지금도 그 꼬르륵하는 소리와 물거품이 선명한 걸 보면 아주 다급한 상황에 쳐했던 게 분명하다. 이처럼 사고사건을 나열한 이유는 어쩌면 내가 악동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요인을 분명히(우연히라도) 주장하기 위해서다.


악동으로서의 첫 기억은 서너 살 즈음에 시작한다. 우리 가족은 어릴 때 외할머니 댁 근처에서 지냈다. 자연스럽게 외가댁 친척과 함께 지낼 일이 많았는데, 사촌형(생일이 2개월 빠른)을 이끌고 외할머니 댁에 있는 선풍기 코드를 끌고 고물상에 가져갔다. 어떻게 설득해서 사촌형을 끌고 선풍기를 가지고 간건지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린 시절에 고물상에 뭘 가져다주면 간식거리를 주시던 외할머니를 기억하고 츄르를 원하는 고양이처럼 애타게 끌고 갔나 보다.

아직도 명절에 가족끼리 술을 한 잔 하는 날이면 아버진 내가 그랬었다며 기억나느냐 묻는다. 나는 속 편하게 생각 안 난다고 하고선 식은땀을 한 번 닦는다. 유년시절 선풍기를 엿 바꿔 먹으려던 나의 재주가 아버지에겐 가장 크게 박혀있다.


유치원에 가고선 악동의 힘이 긍정적으로 발휘되었는지 웅변이 기억에 남았다. 아직도 본가에는 어느 단상에 올라가 양팔을 펼치며 소리치던 모습의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면 이 어린이는 소리 내어 크게 외칩니다!라고 웅변을 마무리 하자 프레스존에서 대통령의 첫 담화를 찍는 기자들처럼 화려한 플래시가 터지는 기억이 떠오른다. 이 적성을 잘 살려 정치인을 했으면 마을 이장정도의 이력은 가져볼 만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그 후로 악동이 긍정적인 적성을 발휘하는 일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초등학교 진학 후에는 검도를 다녔다. 그 이유도 퍽이나 본능적이었다. 게임기를 준다거나 치용치용삐용삐용쾅쾅 같은 벨소리가 나는 자전거를 선물로 준다고 해서였다. 그 시절에는 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에게 전단지를 주면서 유혹했다. 부모님도 내가 원하는 게 자전거일 게 뻔한 건 아셨겠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 혹시 재능이...?라는 의문을 가지며 보내주셨던 거다. 물론 나는 가끔(자주) 가기 싫어 하교 후 데리러 오는 학원 차나 전화를 무시하며 자는 체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가는 둥 마는 둥 하던 내게도 검도장에서 승급심사를 보게 해 줬다. 노랑띠로 올라가는 주제에 꽤나 신선한 내용의 시험이었는데, 무릎 꿇고 앉은 자세로 검을 정면으로 내려치고 바람으로 촛불을 끄는 거였다. 사부님의 시범은 꽤나 정갈했고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에도 충분했다. 문제는 악동의 피가 흐르는 나의 의지에도 불꽃을 지핀 거였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앞서 시작한 친구와 형들이 줄줄이 성공하자 나의 의기도 불타올랐다. 나는 무릎 꿇고 앉아 심호흡하라는 사범님의 조언을 듣고 들숨에 촛불을 초전박살 내버렸다. 검도장은 정적에 휩싸였고 평소보다 세 배는 커진 사범님의 동공이 기억난다. 그 후로 더 이상 연장을 하라거나 상담을 하자는 말은 없었다.


검도와 함께 한창 유행하던 암산학원에서도 나는 지조 있게 악동이 되길 고수했다. 그 당시 암산학원에서는 주판으로 계산하며 계산하는 걸 가르쳤다. 주판을 이용하기 전 두 자릿 수의 덧셈과 뺄셈을 하며 기초적인 연산 능력을 키워줬는데, 나는 주판을 이용해 계산하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연산 능력을 키우는 책 한 권을 떼면서 다른 아이들은 자연스레 모두 주판을 이용하며 사칙연산을 했다. 그렇게 셋넷다섯 자리의 숫자로 넘어가면서 주판을 이용하는 아이들과 나의 연산도 기하급수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학원 선생님은 그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나도 주판의 필요성을 이해할 거라 착각했던 게 분명했다. 오기가 생긴 나는 칠판에 끝도 없이(아마도 대략 20 자릿 수의) 숫자를 적어 놓고 주판을 이용해서 선생님한테 풀어 보라고 했다. 선생님은 한참이나 칠판을 보시더니 끝끝내 풀지 않으셨다. 이후로 암산학원에서도 학원비는 더 이상 내지 않아도 된다고 친절히 부모님께 전화가 왔다.


이외에도 드럼학원에서 드럼 대신에 소파로 연습하다 구멍을 내거나 하굣길에 집에 가는 친구의 발밑에 폭죽을 던져서 놀라게 하는 건 적을 거리도 아니었다.


초등 고학년이 되고선 수업 시간에도 악동의 기억이 멈추지 않았다. 가장 먼저 타깃이 되는 건 교과서였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교과서 앞 뒤의 표지가 지우개로 지워져서 지우며 낙서를 하는 게 유행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성실한 학우들은 계획표를 짜고 나는 표지에 낙서를 했다. 주로 이미 그려져 있는 얼굴을 웃기게 바꾸거나 했는데, 수업 시간에 이런 그림을 짝꿍에게 보여주고 숨죽여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악동의 좋은 자극제였다.

그러다 짝꿍을 건너 옆자리로 앞자리로 교과서가 파도타기를 해가면 이미 교실의 절반은 씰룩이는 얼굴이 되어 수업에 차질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즈음 가면 선생님은 확신에 찬 눈으로 뭔데 그래? 하고 나를 한 번 째려보고선 교과서를 받아 들며 웃는 얼굴을 교과서로 가리시며 소리 죽여 웃으셨다. 결국 백기를 든 선생님은 교실 전체에 돌려서 보게 하고 시원하게 한 번 웃을 시간을 가졌다. 수업 시간에 말고 쉬는 시간에 보라고 차분히 말씀하셨지만 전염성이 강한 웃음 바이러스 덕에 선생님의 입꼬리도 내려가지 않은 게 악동으로써의 자부심이었달까. 나는 그 보람을 잊지 못하고 사람이 많이 나오는 바른생활이라거나 도덕책을 꾸미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악동으로 살아간 이유는 관심을 받기 위해서였다. 집에선 늘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이 집에 늦게 들어오셨고, 부모님의 바쁜 삶만큼이나 그 당시 나도 관심을 받거나 호기심을 해소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나는 타인의 관심을 끊임 갈구하며 외로움을 웃음으로 감추려고만 했다. 그렇게 악동의 피는 점점 짙어져만 갔다.

TV 밑에는 빌라의 관리비를 현금으로 모아놓는 수금통이 있었다. 1동과 2동 총 16세대가 사는 빌라라 규모가 작아 이웃끼리 다 알고 지냈는데, 주기적으로 모여 관리비로 청소를 하거나 창고의 문을 교체하거나 하려는 용도였을 거다.

그런 수금통을 도라에몽을 가진 진구처럼 돈을 빼서 썼다. 처음에는 천 원짜리를 빼내어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사 먹다가 나중에는 수금통에서 천 원짜리며 만 원짜리를 숭덩숭덩 빼내어 동네를 쏘다니던 친구들을 불러 모아 피시방엘 가거나 맛있는 걸 사주며 지냈다. 어린 나이에도 뭔가 잘못된 걸 알았지만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더 크다는 생각에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게 틀리지 않았다. 점점 얇아져 가는 수금통은 악동의 피와 살이 되어버렸다.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은 고된 노동으로 악동의 피를 수혈하고 있음을 뒤늦게 아셨다. 내가 아들이 아니라 도둑을 키우고 있었네라며 밝게 불 켜진 집에 무릎 꿇고 앉은 나에게 하소연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아버지는 그날 회초리를 드셨다. 붉게 물든 종아리를 끙끙대던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전에도 알몸으로 집 밖에 쫓겨난 적은 있었지만 그전에는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잘못한 걸 확실히 알았고, 큰 잘못인 것도 알게 됐다. 그렇게 악동의 피는 매를 맞으며 옅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짙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후에도 학원에서 마치고 오는 누나가 집 열쇠가 없는 걸 깜빡해 오락실에서 한두 시간을 놀다 넋이 나가 있는 누나와 집에 같이 들어가거나 9시에 퇴근하던 아버지보다 늦게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쏘다니며 놀다 태연히 붕어빵이나 호두과자를 사들고 집에 가서 된통 혼나기를 반복했다.

갓난아기일 때는 너무 얌전해서 손도 안 갔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런 걸 보면 막걸리를 먹거나 목욕탕물을 마구 마셔서(환경적 요인으로) 악동의 피가 생긴 게 분명하다.

나 스스로가 악동이라 생각하게 된 에피소드를 나열하니 교육방임주의로 컸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가둘 규율은 책에 좋은 말로 적혀있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유명해지면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나 아동교육의 일벌백계 도입 필요성에 대한 근거 정도로 쓰이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아기가 잠든 저녁 밥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