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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묵 Apr 24. 2023

도토리묵과 샐러드 한 접시

생일상


 올 해도 어김없이 생일이 찾아왔다. 집 앞 담벼락에 핀 목련이 수줍게 소식을 전하곤 내년으로 떠났다. 팍 하고 떨어지는 목련을 보다가,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리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다지도 싱숭생숭한 마음을 들쑤시는지 온갖 봄들이 나를 부추긴다. 살랑이는 바람, 따듯한 햇볕, 종알대는 새와 말소리까지.


 이런 날은 들뜨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말을 아껴야 한다. 달싹거리는 입술을 괜히 만지작 댔다. 그러다 '오늘 약속 없지? 오늘은 나랑 한 잔 하게. 시간 비워.'라는 친구의 연락에 참지 못하고 봄바람 마냥 잇소리를 마구 내었다.


 흩어지는 잇소리에 몸을 맡기며 술집으로 향한다. 생일이 무에 중요하든가. 반가운 얼굴 맞대고 세월 들이켜는 게 중요하지. 라며 잇소리를 좀 더 냈다.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이 오늘은 샘나지 않았다.


오늘은 나도 빛난다 이 말이야 -


 

도토리묵과 샐러드 한 접시

 골목길 사이로 온갖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그중에서 가장 사람냄새가 물씬대는 술집에 들어섰다. 곧바로 내어진 도토리묵과 샐러드 한 접시에 시선이 갔다. 어어 이거 말이지, 오늘 취하겠는데 말이야 라는 생각이 곧장 들었다.

 먹음직한 묵을 빤히 보다가 소주 한 잔을 마신다. 젓가락에 얹어 입에 넣고 씹는다. 입안 가득 부서지는 도토리묵과 짭짤한 간장과 파가 엉키며 맛을 낸다. 침이 고이다 못해 찰랑이며 서로를 뒤섞었다.

 아, 이거지. 이거다. 이거. 오늘 제대로 생일상 대접받는단 생각이 절로 든다. 옛이야기와 옛 친구와 옛 음식이 뒤섞이며 새로운 맛을 낸다. 오늘 하루의 맛이 묵에서 진득하게 배어 나온다. 입에서 굴리던 묵을 꿀떡 삼키곤 친구에게 묵의 설렘을 토로했다.


 요즘 사는 모양새가 말이야. 이 묵을 입에 굴리는 것 같단 말이야? 하루를 씹을수록 부드러워지고 온갖 게 잘 섞인단 말이야. 이거 이래도 되나? 싶거든. 근데, 묵을 한가득 넣고 보니 조금 알 것 같단 말이지. 이거, 아무나 맛볼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묵도 이리저리 굴리면서 맛볼 수 있는 사람한테 진가를 드러내듯이 말이야. 하하. 살다 보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 별거더라고. 날 위해 술 한 잔 하러 와줄 사람이랑 편하게 시간 보내는 거 말이야. 민망하다고? 그래그래. 그럼 이 얘기는 그만하자고.


 아, 그리고 옆에 놓인 샐러드도 빼놓으면 섭하지. 실은 내가 사는 게 재밌다고, 설렌다고 느끼는 건 이 샐러드 때문이란 생각이 드는데. 도토리묵은 나랑 같은 묵이 들어가니 동질감을 느끼는데 말이야. 이 샐러드는 그냥 꼭 나 같단 생각이 든다고.

 겉보기엔 보잘것없는데, 먹어보면 꼭 그렇지가 않아. 한 입 가득 넣으면 아삭거리는 식감에 소스의 맛이 물씬 나잖아. 최근에 꼭 그런 사람을 만났거든. 알면 알 수록 꼭 나 같아서 좋단 말이야. 내가 전에 얘기한 적이 있었나? 언제고 꼭 나 같은 사람 만났으면 싶다고.

 전에, 그러니까 하루를 스스로 좋아하기 이전에는. 나 같은 사람은 없었으면 싶었다고. 불행하니까. 씹어도 아삭거리지 못하고, 소스도 없으니까. 침도 못 고이게 하고 그랬단 말이지.

 근데, 찾은 것 같다고. 이 샐러드 같은 사람 말이야. 사실, 꼭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 여기 있는 샐러드도 온통 새콤한 소스로 칠한 건 아니니까. 쓴 맛이 날 때도 있을 거야. 근데,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쓴 맛이 나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거 보면 말이야. 쓴 맛 날 때는 조금 인상 쓰고 넘겨 버리고, 다시 새콤한 소스 묻혀서 맛있게 먹으면 된단 생각이 든다고. 그래서 요즘 샐러드가 나를 참 설레게 한단 말이야.


 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쉬운 거? 없지. 없어. 자정 지나서 생일 끝난 게 대수일까. 오늘이 지나야 내년 생일도 다시 올 거 아니냐. 그래도 올 해의 생일은 제법 기억에 남겠다야. 도토리 묵과 샐러드 한 접시라니. 어느 음식보다 푸짐하고, 생각에 남는다고. 정말 진심이야. 마지막 잔 깔끔하게 비우고 가자고. 좋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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