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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저씨 Apr 10. 2020

신용카드는 원래 식당 회원카드였다?

당신이 모르는 과거의 4월10일

과거로부터 배우는 오늘 : 위하고 알새과오

목차

대한민국 국호는 언제 처음 탄생했을까?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해의 허름한 월셋집에 독립지사 29명이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최종 논의하던 중 나라이름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선조들이 사용하던 ‘고려’ ‘조선’ 등 여러 이름이 후보로 오른 가운데 신석우가 ‘대한민국’을 제안하자, 여운형 등은 ‘잠깐 쓰다가 망해버린 대한제국을 어떻게 다시 국호로 쓰느냐’며 반대했고,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하자’며 주장을 밀어부친 것입니다. 철야 격론 끝에 ‘대한민국’은 후보에 올라 다수결에 의해 국호로 정해졌고, 이튿날인 4월 11일에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기하여 공표를 하였으니,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공식적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국호는 해방된 나라의 제헌의회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못을 박음으로써 명실상부한 독립국가의 국호가 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 4월 11일, 이날은 ‘대한민국’ 국호가 탄생한 날이라는 것도 잊지 맙시다!


변기는 어떻게 예술이 되었나?

피카소 이후 미술이 난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뉴욕의 전시회에 남성용 소변기가 ‘샘’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품되었습니다. 출품한 화가는 전시회 운영위원이었던 ‘뒤샹’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자전거 바퀴를 떼어다 전시한 경력이 있는 화가였습니다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더럽다고 생각하는 변기까지 등장하자 예술은 개념이 송두리째 흔들렸습니다.

예술가가 가진 기교나 솜씨를 발휘하여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도 예술가의 주제 혹은 의식이 투영된다면 주위에 널려있는 대량생산된 물건들도 얼마든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어떠해야 한다는 도그마로부터 벗어나 예술가 내면의 주제와 의식을 강조한 뒤샹, 그의 작업은 어쩌면 레오나르도다빈치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예술이 중세의 신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으로 주제를 옮겨온 것과 같은 혁명이었을지 모릅니다. 비록 그 작품이 추하고 역겹고 불편하더라도 말입니다. 


신용카드는 원래 식당 회원카드였다?

1978년 오늘 외환은행이 비자(VISA)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신용카드를 발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극소수였던 해외여행자를 대상으로 발급한 카드였으니 지금의 대중화된 신용카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보다 앞서 1969년에 신세계백화점에서 발급한 고객카드를 국내 최초의 신용카드로 보기도 합니다만, 신세계백화점에서만 사용 가능한 카드였습니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신용카드 역시 은행이 아닌 뉴욕의 식당 멤버십 카드였습니다.

미국의 사업가 ‘프랭크 맥나라마’가 지갑을 두고 식당에 갔다가 곤란을 겪은 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식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다이너스카드(Diner’s Card)’를 만든 것입니다. 뉴욕의 14개 식당 가맹점과 친구 회원 2백명으로 시작한 이 카드는 회사 설립 1년 만에 330개의 가맹점과 4만2천여명의 회원으로 급성장하였다고 하니, 지갑을 두고 식당에 갔던 ‘실수’가 오히려 ‘대박’을 만든 것입니다. 


오늘의 표어 <실수했다 자책 말고, 대박 기회 찾아보자!>


일본에게 쓴 소리 할 수 있는 한국인 선수!

1936년에 시작된 일본 프로야구는 미국 메이저리그 다음으로 큰 리그입니다.

그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한국인 전설이 있습니다.

통산 3,085개의 안타와 504개 홈런 기록을 보유한 장훈선수입니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그는 원자폭탄으로 누이를 잃었고, 학생시절에는 조선인 차별에 맞서 싸우다 문제아로 찍혀 야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며,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서는 야유와 곤욕을 치르면서도 끝내 귀화를 거부한 선수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린 시절 손에 화상을 입어 야구를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장애가 있었음에도 은퇴할 때까지 숨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쟁, 가난, 차별, 장애 등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역경들을 딛고 신화를 쓴 그는 은퇴 후 일본 프로야구 명예전당에 올랐고,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유일하게 일본인에 쓴 소리 할 수 있는 외국인’으로 여전히 팬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남의 탓, 환경 탓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이런 인생 스토리가 가능했을까요?

장훈 일대기 - https://www.youtube.com/watch?v=mOJZhbf7Afc


전쟁 속에서도 지킨 전통!

우리나라의 궁중음악기관은 고구려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 세종대왕 시절에는 1,700명의 연주가를 둘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렇게 천년 이상 맥이 이어져 일제강점기까지도 존재하던 궁중음악기관은 해방과 함께 해체되었습니다. 일제가 만든 기관인데다 새로운 정부도 빨리 수립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1월 대통령령으로 문교부 산하에 국립국악원 직제가 공포되었으나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유명무실해졌다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10일이 되어서야 피난지 부산에 처음으로 국립국악원이 개원했습니다.

우리민족의 음악은 우리민족의 언어나 다름 없는 것으로써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존하고 보급 발전시켜 후대에 전승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그렇기에 전쟁의 와중에서도 맥이 끊겼던 국립국악원을 개원했을 것입니다.

최근 동영상 플랫폼의 발달로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 한 국악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해외에서 더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해외에서 극찬을 받고 있는 퓨전 국악 그룹, 잠비나이(JAMBINAI) - https://www.youtube.com/watch?v=wje_Uij4a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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