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 많아질수록 길은 흐려진다
요즘 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요.”
전공도 많고, 직업도 많고, 길도 많다.
검색창에 몇 글자만 입력해도
가능성은 끝없이 펼쳐진다.
하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그만큼 가벼워지지 않는다.
선택이 많아졌는데,
방향은 오히려 더 흐려졌다.
선택이 늘어나면 왜 더 헷갈릴까
상담 시간에 한 학생이 말했다.
“뭘 해도 될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가능성의 과잉’ 앞에서 멈춰 선다.
선택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먼저 정답을 찾으려 한다.
가장 안전한 선택,
가장 후회하지 않을 선택,
가장 성공할 확률이 높은 선택.
하지만 진로에는
처음부터 그런 정답이 없다.
정답을 먼저 찾으려 할수록
방향은 더 보이지 않게 된다.
방향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기준에서 나온다
나는 오랫동안
학생들이 같은 지점에서 막히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선택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기준이 없으면
모든 선택이 무거워진다.
하나를 고르는 순간
다른 모든 가능성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학생들은
결정을 미루고,
미루다 지치고,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방향은
선택의 수가 줄어들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선택을 판단할 기준이 생길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나는 ‘방향’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다
디자인 작업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다 만들지 않는다.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가.
이 조건을 만족하는가.
이 사용자를 고려하는가.
기준이 있으면
수많은 아이디어 중에서도
자연스럽게 남는 것들이 생긴다.
진로도 다르지 않았다.
학생들의 선택을 지켜보며
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방향은
갑자기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선택되는 쪽으로 서서히 기운다.
선택의 흔적을 따라가면 방향이 보인다
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대신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최근에 자꾸 손이 가는 일은 무엇이니.
시간이 날 때 가장 먼저 하는 건 뭐니.
힘들어도 이상하게 계속하게 되는 건 뭐니.
이 질문에 답하다 보면
학생들은 스스로 놀란다.
자신이 이미
어느 쪽으로 자주 기울고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방향은
미래에서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선택들 속에
조용히 숨어 있다.
그런데 요즘,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최근 들어
학생들의 대답이 달라졌다.
“요즘은 그런 시간이 없어요.”
“웹툰이요, 유튜브요, SNS요.”
“좋아하는 걸 찾을 시간 자체가 없어요.”
이 말은 핑계가 아니었다.
지금의 청소년은 바빠서 몰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몰입하기 전에 이미 방해받고 있었다.
선택이 많아진 시대는
집중을 허락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다.
손에 쥔 휴대폰은
쉬는 시간을 채워주지만,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은 남겨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도 전에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고,
다음 알림에 반응한다.
요즘 청소년의 진짜 문제는 ‘좋아하는 게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요즘 청소년의 진로 어려움은
‘좋아하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걸 확인할 시간이 없어서’ 생긴다.
방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잠깐의 멈춤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좋아하니?”라고 묻기보다
이렇게 묻는다.
“방해가 없었다면,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 앞에서
학생들은 처음으로 잠시 멈춘다.
그 멈춤 속에서
비로소 방향의 단서가 보이기 시작한다.
방향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많은 청소년이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조급해진다.
하지만 내가 본 현실은 다르다.
방향은
한 번의 선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작은 선택이 쌓이고,
그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형태를 갖춘다.
디자인에서 그렇듯,
삶에서도 방향은
시도 → 확인 → 조정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완벽한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선택을 해보라고 말한다.
선택이 많은 시대에 필요한 능력
지금의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더 많은 선택지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선택을 견디는 힘.
그리고 선택을 해석하는 눈이다.
이 눈이 생기면
선택은 부담이 아니라
방향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선택이 많은 시대에
방향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정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작게 선택해 보고,
그 결과를 바라보고,
조금씩 고쳐 가면서.
그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방향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사진_Mike van Schoonderwalt
mookss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