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담백한 위로
2008년, 스물넷,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스물넷, 스물셋, 스물여섯, 스물일곱.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이자 인턴사원 열명남짓.
어색하게 차려입은 정장, 묵직한 겨울 코트, 긴장된 표정의 대학생인 우리가 전시컨벤션 회사의 디귿자 테이블에 둘러앉아 인사팀장의 말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었다.
긴장되고 무거운 분위기 속, 키가 크고 얼굴이 작은 남자, 양 눈이 작게 짝 찢어진 남자가 헐레벌떡 뒤늦게 뛰어들어왔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참나, 이런데도 지각을 하냐, 하고 생각했다.
자, 여러분, 이제 팀 배정해드릴게요.
누구, 전시 1팀. 누구, 전시 2팀, 누구 전시 3팀, 문인선 SP팀, 송원구 SP팀.
송원구. 그날의 지각자 이름이었다. 나는 좀 샐쭉했다. 지각 자보단 맞은편에 앉아 여유롭고 능글맞은 표정을 지은채 눈이 마주치면 다정한 미소를 보내는 저 남자가 같은 팀이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다.
우리는 SP팀이라고 천장에 붙어있는 팻말을 찾아가 나란히 파티션 안으로 들어갔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 여자들, 영어로, 중국어로 들리는 전화통화. 책상 주변에 쌓여있는 전시 포스터와 티켓, 부스 도면들. 멋있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게 될까. 긴장도 잔뜩, 주눅도 잔뜩 들었다.
마침, 점심시간인데 밥이나 한 끼 하며 인사나 하고 가지, 시간 되는 사람 같이 가자.
팀장님이 말했다.
학교는, 전공은, 하고 싶은 일은, 어디 사는지, 연애는 하는지,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질문이 늘어나고, 답변을 할수록 어색해지는 나, 과한 미소와 웃음을 더욱 어색하게 연기하는 나와 다르게, 원구 오빠는, 글쎄, 뭐랄까.
담백했다. 아니, 음. 무감해 보였다. 성의 있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에는 짧게 답을 하고 다시 식판을 내려다보았고, 어떤 질문에는 조금 긴 대답을, 그리고 가끔만 웃었다. 오빠는 애씀이 없었다. 애써 무엇을 연기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첫날 그 인상은 내 눈에는 참 버릇없고 개념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빠는 이후로도 가끔 지각을 했고, 여전히 단답형의 대답, 그리고 가끔 웃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빠 곁으로 젊은 남자 직원들이 늘어났다. 원구야, 이리 와 봐. 원구야, 오늘 저녁 뭐하니. 원구야, 너 게임하니. 팀원들은 대체로 원구 오빠에게 질문을, 장난을 많이 쳤다. 나 역시 오빠가 좋았다. 애씀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담백해서. 나와 다른 사람 같아서 신기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매일 주어지는 엄청난 복사, 커피 심부름, 전시회를 앞두고 쇼핑몰 전체에 포스터를 붙이고 무료 관람권을 비치하는 자잘한 일들이 주어졌다. 어떤 날에는 설명회 자료를 프린트하느라, 어떤 날에는 브로셔의 오타를 수정하느라, 어떤 날에는 관련 업체의 데이터베이스를 인터넷에서 찾아 쌓느라 야근도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어느 날에는 사소한 실수, 어느 날에는 비용이 관여되는 큰 실수들도 생겨났다. 매 실수 앞에서 내가 온몸이 경직된 채 어쩔 줄을 몰라할 때마다 오빠가 말했다.
썬- 괜찮아. 별거 아니야. 실수는 다 하는 거야. 쫄 거 없어. 가서 말하자. 말하기 어려우면, 가서 내가 말해줄게. 내가 했다고 하지, 뭐.
원구 오빠가 좌우로 짝 늘어진 눈으로 이렇게 말하던 표정이 떠오른다.
여행 이야기에는 늘 몸을 부르르 떨며 ‘얼른 다시 가고 싶어, 문인선도 꼭 다녀와’ 하고 말하던 모습이.
오빠는 나중에 어떤 회사 가고 싶어? 물으면,
나? 나는 평생 그냥 인턴만 하면서 살고 싶어, 하고 씩- 웃던 그 표정이.
괜찮아, 썬- 별거 아니야. 쫄 거 없어. 다 해결할 수 있어.
하고 담백하게 말하던, 그 말투가 입사를 하고는 한동안 자주 그리웠다. 계열사로 이직을 하고, 새로이 팀을 옮겨서 공간과 환경이 어색해질 때면 늘 원구 오빠가 떠올랐다.
요즘은 아주 가아끔 어떤 날에만 떠오른다. 퇴근 길이 문득 외로운 날에, 또는 신입사원이나 인턴사원이 들어와 내 십 년 전을 떠오르게 할 때에.
오빠는 잘 살고 있을까.
늘 여자 친구가 끊이지 않았던 매력적인 쿨가이 송원구, 왼쪽 어깨에는 라틴어로 굵은 문신을 새긴 송원구, 여름이면 민소매를 입고 어깻죽지에 문신을 드러내고 삭발을 한 채로 박람회에 찾아오던 내 첫 회사 동기 송원구.
어쩌다의 전화통화 속, 조만간 술 한잔 하자 오빠, 하고 말하면, 조만간 언제? 오늘 어때? 하고 말하던 오빠가.
갑자기 아이의 아빠가 되어버려 찾아낼 수 없는 미로 숲으로 들어가 버린 것만 같은 내 첫 번째 회사 동기, 송원구의
괜찮아, 썬- 너무 애쓸 것 없어.
하는 그 느릿한 말투가, 위로가 받고 싶다.
201909
#moonin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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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그 문신 그거 무슨 뜻이야?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