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전문병원 앞에서

아빠와 나, 우리

by 문인선
이제는 내가 지켜줄게 :-) 201908

“아이, 됐어. 이 정도 안 들리는 건 괜찮아. 병원 가면 보청기나 끼라고 하지. 됐어, 안가. 귀찮아.”


하던 아빠는 지난주에


“내가 안 들리기는 좀 안 들리나 봐. 어떤 건 들리는데, 어떤 소리는 명확하게 안 들려.”
하고 말했다.


연차를 내고 예약해둔 소리 전문병원 앞에서 아빠와 만났다.
작년과 6개월 전과 다르게 아빠는 순순했다. 나보다 2-3분 먼저 도착하여 접수대에서 인적사항을 적고 있었다. 3개 층으로 이루어진 전문병원에서 25분간의 청력검사를 받고, 10분 여간 전문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검사 담당자도, 의사 선생님도, 접수대의 직원까지도 명쾌하고 친절했다.

“소음에 많이 노출되셨었어요?” 젊고 명랑한 사십 대 초반의 여자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아빠는 나를 한 번, 의사를 한 번 슬쩍 보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그렇지요. 현장 일을 하거든요, 오래 했지요.”
“상당한 소음성 난청으로 결과가 나왔어요. 오랜 기간 소음에 노출되었던 걸로 보여요. 저주파수의 소리는 잘 들으시는데, 이쪽 고주파수 4킬로 헤르츠 이상의 소리에서는 상당한 난청을 보이네요. 양쪽 귀가 나란히 같은 그래프 패턴을 보이는 걸 보니, 한쪽 귀의 특이성이나 질병이 아니어서 특별한 치료나 훈련이 필요하진 않아요.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께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죠. 일하시며 보호장구를 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 그러긴 어려웠겠죠.”

보호장구.
병원에 나와 돌아오는 길, 아빠가 말했다.
“우리 때는 보호장구 그런 게 없었지. 몸이 다치지 않는 안전사고 주의나 시키지, 귀마개 보호장구까지 관리하는 현장은 거의 없었지. 그런 것까지 챙기며 살 수는 없었어.”
건설현장에서 귀마개의 보호장구까지 챙기며 일하는 환경은 쉽지 않았을 터이다. 그 옛날에 무슨. 요즘에는 환경이 좀 달라졌을까.


아빠와 아침 9시 30분에 만나 병원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보내고, 아직도 오전 11시. 아빠가 지난 8개월간 미룬 일, 망가진 블랙박스의 후방 카메라를 고치러 가자고 했다. 됐어, 나중에 나 혼자 가면 돼. 하길래, 아빠 혼자 간다 해놓고 벌써 8개월 미루지 않았느냐고. 지난번 골목에서 후진하다가 가로등에 범퍼를 콩- 하고 박지 않았느냐고. 오늘 종일 시간도 많고, 아직 점심도 안 되었으니 후딱 다녀오자, 설득에 성공했다. 오늘 아빠는 웬일로 순순하다.
우리는 나란히 차 안에 앉아 후방카메라를 고치러 간다.


“인선아, 얼마 전에 영재 발굴단에 어떤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애가 나왔거든? 외국애야, 근데 걔가 6.25 전쟁 전문가인 거지. 전쟁 이야기랑 역사를 줄줄 꿰면서 이야기를 하더라니깐. 그리고는 참전용사들을 찾아가서 댄스 공연도 하고, 인터뷰를 하고는 그 할아버지들을 먼저 팔을 벌려 꼬옥 안아주는 거야. 어찌나 귀엽고 웃기던지. 애가 어른을, 어른이 아이 안아주듯이 꼬옥 안아주더라니까. 그 참전용사 노인들이 얼마나 뿌듯하겠니. 다들 자기들을 잊는데, 그 어린애가 그렇게 자기를 알아주니 말이야.”


오늘 아빠의 수다는 엄청나다. 나는 연차도 냈겠다, 오늘만큼은 아빠의 수다를 기꺼이 받아주기로 다짐한다.
- 그러게, 애가 끼가 엄청 많은가 보네, 내가 말한다.
“그렇지! 끼가 엄청 많은 애지, 엄청난 애야. 인선이 너도 참 끼가 많았는데. 너랑 지섭이도 엄마랑 내가 잘 발굴해줬으면, 잘 되었을 텐데.”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돈다. 아빠,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차 안에서 눈물 쏙 뺄 수도 없고,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마음에 짐짓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 지섭이랑 나랑 엄마 아빠가 잘 키웠지. 우리 끼 많게 잘 키웠어.


“아냐, 너희도 끼 엄청 많았어. 더 잘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더 많이 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고 그런 게 있지.”.
- 아빠 엄마 닮아서 나 학교 다니는 내내 글 쓰고, 다 커서는 그림 그리고. 우리 재능 발굴 잘 되었어. 나 글 쓰는 거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 상, 좀 받았어? 얼마나 많이 받았어. 결국 국문과 와서, 잘 됐지. 뭐, 기자 되겠다고 한 거 못하긴 했지만, 기자 안 하기를 또 얼마나 잘했어. 우리 잘 됐어. 우리 엄청 잘 됐어, 아빠.

아빠 엄마가 우리 잘 키웠어.


해놓고는 머쓱하다. 나도 머쓱하고, 아빠도 머쓱하다. 서른이 넘은 딸에게 아빠는 갑자기 뭐가 아쉬움이 있고 미안하다는 걸까. 이렇게 잘 키워놓고는. 영재 발굴단의 6.25 영재 아이를 보고 왜 갑자기. 나도 국사 공부나 열심히 해서, 아빠 앞에서 잘난 척을 좀 해볼걸.


후방카메라를 고치고 요즘 아빠의 일터에 온다. 얼마 전부터 임플란트 시술을 받고 있어 아빠는 엄마가 끓여 준 버섯죽을, 나는 앞에 앉아 미숫가루를 마신다. 더운 여름 아빠의 현장. 이런저런 일들을 조금 도왔다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아빠가 틀어놓은 웅산의 노래를 크게 들으며.


어느새 해가 어둑한 저녁 시간이 되어, 나는 근처의 수영장에 가고 아빠는 집으로 가기로 한다.


“그래도 덕분에 병원 다녀와서 개운하다. 내 증상을 정확히 알게 되니까 아주 시원해, 고맙다.”


- 조심히 들어가요!


서른이 넘은 다 큰 딸은 이제 아빠와 같은 집에 가지 않고, 내 집으로 간다. 날씬한 아빠의 뒷모습. 이제는 아빠의 귀도, 아빠 차의 후방카메라도. 신경 쓸 것들이 하나 둘 더 늘어나겠지. 그렇지만 그게 당연하지, 뭐.


아빠와의 대화, 느닷없이 훅 들어온 미안하다는 아빠의 고백, 보청기는 안 써도 된다는 의사의 진단. 오늘 하루가 잔잔하게 지나간다. 오늘의 하루. 더없이 평범한 오늘 일상이 어느 날 문득 오래 기억나겠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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