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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밍크코트

by 문인선


너 엄마한테 그러지 마.
너 화난다고 엄마한테 화내면
나도 너 싫어.
엄마도 감정 있어.
너 그 성질머리, 그거 나도 니가 내 자식이니까 받아주는 거야, 내가 니 엄마라서.

엄마는 심술을 부리는 문지섭에게
이렇게 말하고 현관을 들으란 듯이 쾅 닫고 나왔다며
나와 마주 앉아 양쪽 눈을 크게 찡긋하고는 웃었다.

나는 저런 엄마가 너무 좋다.
늘 할 말을 하는 엄마, 감정을 표현하는 엄마,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한 엄마,
내가 한 귀걸이가 예쁘다고, 목걸이가 예쁘다고 말하는 엄마,
엄마 할래? 하면,
너 하는 거 아니야? 나야 주면 고맙지~ 오호호홓,
하고 웃는 엄마가
늘 귀엽다.

고무신 공장장의 막내딸로 태어나 한남동에 살면서, 고무신을 팔아 번 돈으로 할아버지가 늘 빨간 에나멜 구두만 신겨 키웠다는 울 엄마,
형제자매 중 제일 예뻐서 외할머니가 어디든 데리고 다니며 “우리 막내딸이에요” 하고 으쓱해했다는 우리 엄마.
할아버지의 고무신 공장이 망하고(아마 운동화가 등장하는 시점이었겠지), 할머니의 정육점도 큰 외삼촌이 돌아가시며 어려워지고, 할아버지가 당뇨로 쓰러지시고, 그렇게 막내딸의 사회적인 위치도 점점 가라앉았다는 그 시절의 흔한 역사 속에서
엄마도 지냈다.

미대 꼭 보내세요, 하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말했다지만
엄마는 갈 수 없었다고, 장남의 피땀과 청춘, 여동생들의 체념과 포기로 대학은 둘째 외삼촌에게 몰빵 되었다고,
그 시절은 다들 그렇게 살았다지만, 당사자인 엄마에겐 역시 아쉽고 애달픈 순간이 아닐까.

엄마는 오늘,
내가 3년 전 겨울에 사준 밍크코트의 솔기가 터진 것을 수선하러 나왔다.
엄마의 밍크코트.
엄마는 아주 옛날부터 기다란 천연 모피코트를 입고 싶다고 했었다. 동네의 보세 가게부터 중저가 여성의류 로드샵을 지날 때마다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200만 원, 150만원이에요, 99만원.
대답을 들을 때면 엄마는 코트의 소매를 한 두 번 쓰다듬고는 돌아섰다.

모피코트.
그래서 나에게 모피코트는 뭐랄까, ‘자식의 성공’의 입문 단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엄마, 내가 취직하면
돈 많이 벌어서 모피코트 사줄게!
하는 공수표를 나는 한 천 번쯤 날렸으니까.

그런 내가 2010년에 입사하고는 엄마에게 모피코트를 2016년에 사드렸으니, 아마 엄마는 속으로 오래오래 기다렸을 것이다. 아니지, 가끔은 은근하게 티를 내었지. 집 우편물로 온 백화점 전단지의 종이를 둘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으니까.

인선아, 모피 행사한단다! 39만원부터래?

그래놓고도 모른 척했던 것은
모피코트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39만원은 긴 목도리 정도였지, 엄마가 말하는 하프코트라도 살라하면 200만원, 300만원 이랬는데
이건 나에게도 사치스러운 환경 속, 사치 전염병에 걸린 그 시절에 명품가방 한 개의 가격이었으니까.
엄마의 모피코트이냐, 나의 가방이냐, 같은 택일의 문제였으니까.

그러다가 2016년 겨울,
엄마! 모피코트 사러 가자!
시집 가면, 이제 진짜 못 사줄 수도 있어!
하고 마음을 먹었다.

그날 엄마와 나는 숱하게 많은 모피를 입었다 벗었다.
190만원짜리를 입었다가, 290만원, 390만원. 매장 매니저 아줌마는 내 속도 모르고 자꾸 비싼 것을 건네다가
천부적인 그녀의 직감으로 결국 내가 호구 또는 얇은 귀라는 것을 눈치챘고, 마침내 매장에서 제일 비싼 코트를
엄마에게 입혔다.

이게 통밍크에요, 밍크 중에도 제일 좋은 친칠라, 안감까지 이렇게 호피 패턴의 실크로.
이건 뒤집어 벗어놔도 그 자체가 멋이죠.

우리가 돈이 없지, 스타일이 없나, 턱없이 올라간 눈높이에 아까 입었던 코트들은 보이지 않고
결국, 결국 그 코트를 사게 되었다. 물론, 할인에 할인에 할인을 받고, 상품권 사은품까지 챙겨가며. (샀더라도 너무 비쌌다)

그 날 엄마의 기쁨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진작에 사드릴 걸, 내가 좀 아끼면 되는 건데. 내가 술도 덜 먹고, 가방도 구두도 안 사면 되는 건데. 천 번의 공수표를 이제야 회수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날 성공한 자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조금 으쓱해하며 잠에 들었다.

오늘 솔기가 망가진 코트를 들고 온 엄마에게
매장 매니저 아줌마는
이 코트는 이제 찾는 사람은 있어도 나오지도 않는다고, 몇 점 나오지도 않았던 건데 참 좋은걸 사두었다며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
저희 집 모피 몇 개 더 있으시죠?
이 네이비 롱코트 이번에 나온 거 한번 입어보세요, 엄청 산뜻하죠?
엄마는 거울에 몸을 왼쪽 오른쪽 돌려보고는
맘에 드는 미소를 짓는다.

얼마예요? 하고 내가 묻는다.
가격은 잘 맞춰 드리죠! 할인하면, 이 정도! 갖고 계신 거에 비하면 가격 너무 좋잖아요, 하나 더 하세요!

엄마랑 나는 이제 가격에 놀라지는 않는다.
대신 엄마는 솔직한 척 말한다.

아이고, 바로 막 사기는 너무 비싸죠!
수선 찾으러 올 때까지 생각해볼게요!

우리는 사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 더 비쌀 줄 알았는데 괜찮네. 예쁘긴 예쁘다, 하고 매장을 돌아나온다.


(2019년 11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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