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제화방

화방에 가는 일

by 문인선


9B 흑연 연필로 그린 향유고래 20200129




화방을 가는 일은 괜히 부끄럽다. 내가 화방에서 의지를 갖고 잘 알아보고 구매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4B연필, 톰보이 지우개, 파버카스텔 색연필의 수채 가능 여부 정도이지, 그 외의 수만 가지 용품들이 어떠한 용도로 쓰이는지를 나는 좀처럼 모르겠다.
그래서 화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뭐랄까,
내가 들어갈 문이 아닌 것 같은 곳, 난 아직 들어갈 수 없는 곳 같은 느낌이 있다.
스무 살 은희, 기옥이, 혜진이랑 처음 가보았던 홍대 클럽 입구를 지나 지하 계단으로 들어서는 기분. 아직 내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닌 곳을 들어갈 때의 어색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여긴 나 말고, 더 전문가들이 드나들어야 할 곳. 아직 나 같은 아마추어는 발 디디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중압감을 주는 곳. 화방. 화방 간판, 화방 입구.


그래서 집 앞에 있는 국제화방을 매일 침만 흘리며 지나다녔다. 지난 2년간.
차마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국제화방은 스무 살, 학교를 다니는 그 통학버스 안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며 보기만 해도 꽤 오랜 역사를 지닌 화방 같았으니까.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지금 잘 나가는 현대미술가들이 거쳐간 곳 같았으니까. 머리를 질끈 묶은 선화여중, 선화예고 친구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으니까.
마침 재작년 사다 놓은 스케치북도 연필도 다 남아 있어서, 그래서 난 국제화방 옆에 살면서도, 매일 출근하며 가게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좀처럼 가게 문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늘 겁이 많은 쫄보라서.


그리고는 이사온지 2년 하고 한 달 만에 오늘 가게 문을 열었다.
아픈 김에, 장염에 휘청거리는 김에, 약 기운에 취해서 용기를 내보았다.
안녕하세요! 하고 성큼 가게 안을 들어섰다. 밖에서 슬쩍 보던 것과 다르게 가게가 넓고 깨끗했다.

뭐 찾으세요? 출근길에 마주치는 회색 머리의 덩치 큰 주인아저씨는 내 상상과는 다르게 너무 세련된 표준어를 썼고, 적당히 내성이 섞인 친절한 말투를 갖고 있었다.
찾는 것도 필요한 것도 없었지만, 괜히 어색해서 서둘러 말했다.
연필그림 그릴 에이포 사이즈 스케치북이요!
아저씨는 성큼 걸어서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지금 에이포 스케치북 남는 것은 190그램짜리밖에 없는데~
나는 190그램의 종이 두께는 두꺼운 것일까, 얇은 것일까 하고 몰라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아, 괜찮아요! 얇아서 그러실까 봐 그러죠? 하고 대꾸했다가 곧 아저씨의 대답과 스케치북의 매수를 보고 머쓱했다.
연필그림 그리기에 190그램짜리가 얇지는 않죠. 이 정도면 두툼할걸요~
매수를 보니 스케치북 한 권에 종이는 25매뿐이다. 집에 와 열어보니 종이의 굴곡면이 거칠게 도드라지는 스케치북, 수채화를 배울 때 주로 썼던 그 종이 같다. 한번 더 머쓱하다.
또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저씨는 내가 귀찮은 모양인지 자꾸 필요한 것을 찾아 주려하고, 나는 용기를 내어 들어온 이곳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기만 하다.
조금만 구경하다가 갈게요!
하고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하다가
9B라고 쓰여있는 연필 앞에 오똑 섰다. 4B도 충분히 진한데, 9B는 얼마나 진할까. 그 색을 상상하다가 연필을 들어 계산대로 갔다.
이건 어떻게 깎아 써야 해요? 연필깎이로 돌려도 돼요?
그건 깎아 쓰는 거 아니에요, 통 흑연이에요. 그냥 사선으로 굴려가며 쓰는 거예요.
아저씨는 전문가 같다. 아저씨가 저렇게 말해주어도 나는 저 연필의 뾰족한 심이 닳게 되면 어떻게 다시 돌려 만들어야 할지를 상상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도 9B 연필심의 색이 궁금하여 연필을 챙겨 나온다.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필요한 것도 모르겠고, 내 수준에 필요한 것은 이미 갖추고 있는 것 같아 서둘러 나온다.


종이의 굴곡면이 울퉁불퉁한 이 두툼한 새 종이 위에 9B 흑연으로 나는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언제든 그리고 싶은 것을 바로, 명확하게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떤 포즈를 상상한 대로 그 모습으로, 어떤 표정을, 얼굴의 각도를, 손가락의 굽은 각도를 자유롭게 그려낼 수 있다면, 골목에 서있는 가로수를, 첩첩이 쌓인 고층빌딩을, 빌딩 사이로 거뭇하게 지는 석양을 그려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엄마의 밍크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