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 처절하게 후회했던 기억… 남을 상처 주고 또 상처받았던 기억… 버림받고 돌아섰던 기억…그런 기억들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아가는 자만이 더 강해지고, 뜨거워지고, 더 유연해질 수가 있지. 행복은 바로 그런 자만이 쟁취하는 거야.
그러니 잊지 마. 잊지 말고 이겨내. 이겨내지 못하면, 너는 영혼이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야.”
―고문영,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 위즈덤하우스―
맞다. 나는 아직도 영혼이 자라지 않은 어린애이다. 요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컨디션이 저조한 날이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 버리고 떠나는 악몽을 꾼다. 정도가 심한 날에는 실제로 자면서 오열을 해버린다. 옆에 잠든 남편이 깜짝 놀랄 정도로….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불안을 안은 채 몸만 커버린 걸까? 아마도 열네 살 학교에서 돌아와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한 날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오늘처럼 날씨가 푹푹 찌는 무덥고 습한 7월이었다. 하교 후 엄마에게 ‘얼음을 동동 띄운 차가운 미숫가루를 타 달라고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30분을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방안에 누워 있었고 할머니와 고모는 쉬쉬거리며 나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멍청이가 아닌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자살 시도… 빙초산을 마셔 버려서 식도가 잘못하면 다 타버릴 뻔했다는 고모의 입 싼 말들. 믿을 수가 없어서 뇌가 정지해버렸었다. 전날에 아빠가 술을 먹고 집안 살림을 다 부순 다음 날이었다. 술에서 깬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출근을 해버렸지만,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꿈이었던 예민한 감수성의 엄마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절망에 파묻혀 버렸다. 그게 첫 번째 자살 시도였는지 아니면 그전부터 그랬는지 확실히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날 이후 세 번 정도 더 삶을 끝내려 했다.
아빠가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는 엄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내게 전부였던 엄마. 그녀는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슬프면서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려 했다는 그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내 목줄을 쥐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수많은 심리학 서적, 자기 계발서를 읽어도 책을 읽고 나면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우울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쓸데없이 잘 웃지만 나는 안다. 속으로는 울고 있다는 것을. 인스타그램에 신랑과 우리 아이와의 추억이 담긴 피드를 소소한 행복이라는 태그를 달아서 꾸준하게 올린다. 하지만 나는 안다. 원가족이 준 상처는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까지 슬픈 기억을 현재의 행복한 추억들로 보기 좋게 덮으려고 했다. 가능하면 멀리 도망치려 했는데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을 읽으며 깨달았다. 행복해지려면 잊지 말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유리 멘탈이라 뜬금없는 상황에서도 눈물이 터지는 내가 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쁜 기억의 목줄에서 해방되고 싶다.
얼마 전 종영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속 주인공 염미정처럼. 그녀는 과묵하고 회사 동료들과 교류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만나온 남자들은 다 개새끼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 아싸(아웃사이더의 줄임말) 들과 새로운 동아리 ‘해방 클럽’을 결성하게 된다. 다이어리를 사서 자신의 이야기를 적고 멤버들에게 들려주는데 그 어떤 조언도 서로에게 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활동이다. 그렇게 글쓰기를 통해 그녀의 덮어 두었던 상처들과 마주하며 용감해진다.
작가 김영하 님도 그랬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 해방을 하라고. 나는 현재 쓰는 행위를 통해 치유 중이다. 과거와 화해 중이다.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글을 통해서 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상처가 부끄럽고 타인이 우습게 볼까 봐 겁이 난다. 하지만 글쓰기만큼은 가식적으로 하고 싶지 않다.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쓸 것이다. 계속 쓰다 보면 그 끝에 자기 해방이 되어서 행복으로 충만한 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을 억지로 잡아당기기 싫다. 자연스럽게 그 두 글자가 나에게 다가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