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잉~ 진동이 울린다. 액정을 보니 외할머니댁이라는 발신 번호가 뜬다. 통화 거부를 누르고 싶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액정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외할머니와는 데면데면한 사이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외사촌들이랑 놀지 않고 말없이 책만 본다고 ‘차가운 년’이라고 욕을 하신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나를 별로 이뻐하지 않으셨다. 첫 손주인데 왜 그럴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마음대로 소설을 써 본다.
아마도 당신 딸 고생만 시키는 사위와 똑 닮아서 그랬을 것이다. 결국 좋은 기억은 별로 없이 성인이 되어서는 외갓집에 가지 않았다. 결혼 후에는 결혼식 때 한 번, 우리 아이가 다섯 살일 때 한 번 그렇게 딱 두 번 만남을 가졌다.
지금은 충청북도 부여군에 혼자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는 올해 80 중반을 넘으셨다. 외할아버지는 한량, 백수 생활을 열심히 하다 일찍 생을 마감했다. 생활력이 강했던 외할머니는 식당을 하며 삼 남매를 키웠고 욕을 참 잘하는 욕쟁이 아줌마였다. 그랬던 분이 지금은 머릿속의 지우개가 생겨 버렸다. 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가장 서글픈 병, 치매이시다. 외할머니의 여자 형제분들도 이 병을 앓다가 생을 마감하셨으니 유전인 것 같아서 겁이 난다. 우리 엄마도, 나도 나이가 들면 행복한 기억, 불행한 기억 모두 깨끗이 지워 버릴까 봐.
그림책 『우리 할머니가 이상해요』를 읽으며 외갓집의 슬픈 저주가 떠올랐다. 그림책 속 할머니는 어느 날부터 손자를 못 알아보고 누가 자신의 돈을 훔쳐간다며 은행에서 다짜고짜 인출을 해서 집 여기저기에 숨긴다. 엄마도 외할머니와 통화를 하면 누가 자기를 죽이러 온다며 데리고 가달라고 하신단다. 전화를 할 때마다 그 말을 듣는 우리 엄마, 할머니의 딸은 마음이 어떨까?
다시 첫 줄로 돌아가서 한참을 울리는 진동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엔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충청도 사투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여보슈, 00이냐? 너희 아가는 잘 켜? 몇 살이여?” “이제 12살이요. 안 아프고 잘 크고 있어요.” “그랴. 근데 너는 애도 다 컸는데 일 안 하냐?” “네에…. 이제 하려고 알아보는 중이에요.”
몇 초간의 적막이 흐른 후 다시 똑같은 대화가 되풀이된다.
“여보슈, 00이냐?…….” 외할머니는 그렇게 똑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다섯 번을 하더니 알았다며 전화를 끊으신다. 외할머니의 기억들은 풍선이 되어서 하나씩 하나씩 날아가는 중이다.
통화가 끝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먹먹해져 어릴 적 사진첩을 뒤적인다. 하지만 앨범을 아무리 훑어도 어린 시절 그녀와의 사진이 딱 한 장 밖에 없다. 사진 속 빨간색 체크무늬의 멜빵바지를 입고 볼 빨간 다섯 살 어린이가 보인다. 아이는 외할머니에게 안겨 볼을 맞대고 있다. 둘 다 빵긋이 웃고 있다. 상당히 사이가 좋아 보인다. 너무 어려서 그때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진 한 장으로 외할머니와의 희미한 추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생과 여름 방학 때마다 외갓집을 갔다. 그때는 대전 외삼촌 집에 외할머니가 같이 살았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면 대전역에 큰외삼촌이 마중 나와 있었다. 같이 사는 시어머니의 매서운 시집살이에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함께 가지 못했다. 동생과 나 둘만 기차에 태워 보냈다. 그마저도 친할머니가 여자애 둘만 대전까지 보낸다고 간도 크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누구인가? 왕년에 부여 바닥을 주름잡았던 사나운 욕쟁이 아줌마 아니었던가! 1년에 한 번, 딸내미 얼굴은 못 봐도 외손주들은 꼭 봐야겠다며 전화로 두 분이 한 판 붙었다. 욕을 시원하게 하셨는지 내막은 모르지만 결국 외할머니가 승리했다.
대전까지 3시간 정도 걸리는 무궁화호에 오르면 엄마는 승객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는 착해 보이는 여자 승객 또는 아이와 함께 탄 아줌마에게 돈과 함께 우리를 부탁하고 출발하기 전 내렸다. 낯선 사람과의 동행은 불편했지만 틈틈이 간식도 주고 어른 없이 용감하다며 칭찬받아서 우리는 신이 났다. 그렇게 3시간을 달려서 외삼촌 집에 도착하면 그녀가 찰옥수수를 한 솥 가득 삶아 놓고 동생과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00이 옥수수 잘 먹잖여. 내가 부여 장날에 가서 사 온 진짜배기 국내산이여. 어서 먹어.” 갓 삶아서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옥수수를 건네준다. 달큰하고 그녀의 사투리만큼이나 구수한 향이 코를 감싼다.
옥수수 킬러인 나는 앉은자리에서 5개 이상을 쩝쩝거리며 먹는다. 사카린에 푹 절은 옥수수 알맹이가 손톱에 끼이고 손가락에 쩍쩍 달라붙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면 그녀가 직접 손으로 알알이 옥수수를 까신다. 3개 정도 깐 옥수수알들을 그릇에 수북이 담아 놓으면 신이 나서 숟가락으로 퍼먹고 금세 빈 그릇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일주일간 매일매일 옥수수를 삶아 주셨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입안에서 터지는 옥수수의 쫀득쫀득한 식감이 짜릿했다. 신화당을 넣어서 달짝지근한 그 맛은 초콜릿의 느끼한 달콤함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도 샛노란 옥수수 말고 검은색과 갈색이 뒤섞인 손바닥만 한 찰옥수수를 보면 푸근했던 외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는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외삼촌들이 요양병원으로 보내려고 한다. 아직 까지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언젠가는 ‘000’이라는 첫 손주의 이름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지겠지. 그렇게 되면 외할머니한테 우리들의 추억, 옥수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녀가 반복해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나도 몇 번이고 오늘 쓴 이 글을 읽어 줄 것이다. 머릿속 지우개가 그때만은 작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련 그림책-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부모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낯선 행동을 보이면 우리는 어떤 기분이 들까? 눈을 끔벅이며 우리에게 누구냐고 묻고, 사소한 일로 화를 버럭 낸다면? 네버랜드 세계의 걸작 그림책 191번째 책, 『우리 할머니가 이상해요』는 작가 울프 닐손이 여섯 살 때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묵직한 주제인 치매 이야기를 이상해진 할머니에게 일어난 한낮의 해프닝으로 가볍게 풀어낸다.
여섯 살 꼬마인 '나'는 어느 날, 할머니가 이상해진 것을 알게 되지만, 의심이 심해지고 욕심이 많아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아무 편견 없이 '달라진' 할머니를 받아들인다.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린 할머니는 조금 섭섭해도, '나'는 할머니를 지켜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작품 속 아이가 두려움 없이 ‘이상해진’ 할머니를 받아들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할머니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 할머니가 아이에게 보여 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아이 마음속에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할머니를 돌보는 아이의 모습은 어떤 상황에서도 든든한 힘이 되는 진정한 가족 사랑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