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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Aug 04. 2022

앞니 하나 없는 게 뭐 어때서?

-그림책 <짧은 귀 토끼>를 읽고-

"어머니, 아이의 위쪽 치아 한 개가 결손이네요."

의사 선생님이 건조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그는 별 일 아니라는 표정이지만 나는 당황스럽다. 내 평생의 트라우마가 우리 아이에게도 똑같이 생긴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게다가 잇몸 속에 숨은 기형치아가 대문 앞니를 못 내려오게 막고 있단다. 이걸 놔두면 치아 배열이 완전히 뒤틀어지니 전신마취를 해서 제거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설명. 깊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치아가 얼굴의 인상을 얼마나 좌우하는데...


믿고 싶지 않아서 대학병원 두 군데, 일반 치과 세 군데 총 5군데를 가서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치아가 한 개 없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결손 치아 자리는 성인이 돼서 임플란트를 하거나 아니면 교정을 해야 한다는 말들이 수백 개의 바늘이 되어서 심장에 꽂힌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실내화를 갈아 신는 신발장 입구에 머리를 양갈래로 곱게 딴 내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오이 같이 길쭉하게 생긴 녀석이 자꾸 시비를 건다. 머리를 잡아당기고 내 이름으로 별명을 만들어서 '양털'이라고 놀려댄다. "하지 마!!!"라고 소리쳐도 귓구녕에 못을 박았나 들은 척도 안 한다. 한껏 째려보다가 지쳐서 돌아서는데 순간 그놈이 발을 걸었다.


무슨 심보지? 내가 개무시해서 심술이 났나? 양손에 실내화 주머니와 준비물 가방을 들고 있어서 미처 손을 짚지 못했다. 그대로 얼굴과 시멘트 바닥이 키스했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어린이였다. 대문 앞니 하나가 반으로 부러졌고 얼굴에서 피가 철철 났다. 피가 많이 나니 놀라고 무서웠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한 욕을 했다. "개새끼, 죽여버릴 거야." 친구들이 나를 양호실로 데려갔고 조금 이따 회사에 있던 엄마가 놀라서 달려왔다.


응급처치로 지혈을 하고 부러진 이빨을 차가운 우유에 넣어서 치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의 짧은 설명, 지금은 부러진 것을 붙일 수 없단다. "영구치이고 자라나는 치아라 성인이 되면 다시 오세요." 그때까지 이렇게 부러진 채로 다녀야 합니다. 말도 안 돼. 거울 속 내 모습은 마치 영구(그 당시 유행했던 바보 캐릭터) 같다. 내일부터 학교에 어떻게 가지?


역시나 다음날부터 철딱서니 없는 남자애들이 삼삼오오 키득거리며 나를 놀려댔다. 웃어보라고 영구 동생 맹구냐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의리파 여자 친구들이 곧바로 담임한테 알렸고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나를 앞으로 부르셨다. 앞으로 날 놀리는 아이들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반애들 앞에서 선전포고를 하셨다. 그날 이후로 놀리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말할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웃픈 습관은 스무 살이 되어 라미네이트로 치아 복원을 하고서야 사라졌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날 보고 빵 터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보냈다. (그래서 더 과묵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니. 앞니의 저주인가 싶어서 말문이 막힌다.

아이는 전신마취를 하고 한시간 가량 수술을 해서 기형치아를 깔끔하게 제거했다. 그러나 새로 나는 치아들이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틀어지고 있다. 이제 사춘기가 시작된 녀석은 외모에 부쩍 공을 들인다. 한참 동안 거울을 보며 앞니가 돌아갔다고 시무룩해한다. 나는 위로 대신 그림책 <짧은 귀 토끼>를 읽어줬다.

주인공 동동이는 토끼지만 귀가 짧다. 다른 친구들처럼 귀를 늘리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대신에 다른 재능을 찾게 된다. '짧은 귀가 어때서? 빨리 달리고 높이 뛸 줄 아는 게 더 중요해.' 의기소침했던 마음에서 벗어나 당당해진 주인공을 보며 우리 아이도 콤플렉스를 극복했으면 한다.


인생을 나아가는 데 있어서 치아 하나 없는 거 큰 일 아니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길. 엄마처럼 손으로 입가리며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사람은 되지 않길. 2대에서 끝이나고 3대째로 이 저주가 반복되지 않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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