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열두 시간 넘게 일하는 엄마를 모른 척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슬픈 기억이 더 많은 부산을 떠나고 싶었다. 이틀에 한번 꼴로 반복되는 어른들의 싸움, 우울증으로 무기력한 엄마를 보는 게 지쳤다.
캠퍼스에서 짝꿍처럼 붙어 다녔던 소울 메이트도 졸업과 동시에 신림동에 올라갔다. 같은 과 동기, 선배들도 하나둘씩 고시촌으로 떠나갔다. 학교에 덩그러니 남아 있기 싫었다. 어쩌면 서울에 있는 대학은 못 갔어도 고시공부를 핑계로 인서울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스물다섯,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 신림동에 입성했다. 혼자 생활하는 독립의 시간은 달콤했다. 걸그룹 ‘씨스타’의 노래처럼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돌아다니고 나 혼자 공부하는 하루하루가 편안했다. 골치 아픈 집안 문제는 신경 안 써도 되고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고시원-독서실-학원을 반복하며 고시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에 익숙해지고 6개월이 지날때부터갑자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압박과 스트레스였다.
행정고시 1차 PSAT 시험은 지금까지 해왔던 공부와 완전히 달랐다. 학교 고시반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성적이 좋아서 우쭐해져 있었다. 하지만 전국에 고시생들이 모여든 신림동에서 우월감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SKY생들과 스터디를 하며 단숨에 깨달았다. 내 머리는 쨉도 안된다는 것을.
지금까지 단순 암기식 공부에 익숙했던 사람에게 아이큐 테스트 문제 같은 시험은 벅찼다. 기출문제를 아무리 풀어도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성실하게 꾸준히 하면 붙을 줄 알았는데 고시촌에 모여든 수험생들 모두가 그렇게 공부했다. 나만 그렇게 한다고 성적이 나아질 리 없었다. 빡빡하게 계획표를 짜서 새벽 6시에 기상해 학원 강의에 자리를 맡으러 갔다.
그 당시 나의 독서실 책상 앞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붙어있던 명언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였다. 그러나 명언은 명언일 뿐 학원 모의고사 성적은 엉망진창이었고 2년 만에 합격해서 내려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내가 같잖게 여겨졌다.
별명이 ‘잠보’여서 어디서나 머리만 대면 잘 자던 사람이 일주일에 서너 번씩 가위에 눌렸다, 새벽 3시 귓속에서 알 수 없는 여자 목소리가 웅얼웅얼 중얼거리면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었다. 수술 전 마취 주사를 맞고 수술대에 누웠는데 도중에 깨어버려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악몽으로 잠을 설치는 날이면 다음날 머리가 멍해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압박감으로 짓눌려버린 마음은 점점 더 심해져 몸무게가 5~6킬로그램 줄어들고 머리가 한 움큼씩 빠졌다.
그림책 『빨간 나무』를 읽으며 스물다섯 무모하게 행정고시에 도전해 힘들었던 내가 보였다.
그림책 속 주인공이 종이배를 타고 빨간 단풍잎을 쳐다보는 표지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아이가 회색빛 삭막한 도시를 하루하루 견뎠던 것처럼 머릿속으론 자살을 상상하면서도 행동으론 빈틈없는 시간표를 짜서 똑같은 일정을 반복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해져 가던 주인공은 마지막에 빨간 나무를 발견하며 희망을 찾았는데 나의 빨간 나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 하나 죽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그곳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발버둥 쳤다.
어릴 때부터 친구도 많지 않은 데다 집에 박혀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니 가족과 동떨어져도 고시촌에서 씩씩하게 잘 지낼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소울메이트는 공기업에 합격해서 신림동을 떠났고 같이 올라간 동기들 선배들도 각자 고시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가족들만큼 날 챙겨주고 신경 써주는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고3 수험생 시절보다 더한 시험의 압박은 날 병들게 했고 결국 부산으로 돌아왔다. 딱 2년 만에. 행시 합격이 아닌 한국전력 인턴에 합격했다는 핑계를 부모님께 대며.
엄마는 잘 돌아왔다고 괜찮다고 말해줬지만 고시생 뒷바라지가 물거품으로 돌아가 허망했을 것이다.
고시 생활을 하면서 딱 하나 얻은 게 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에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누구도 나에게 말 걸지 말라는 무언의 행동을 하며 다녔다. 가족들과도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던 날이 대부분이었던 고시촌 생활에서 알게 되었다.
난 누구보다 의지할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