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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Aug 11. 2022

매주 일요일 오전

-그림책 <장수탕 선녀님>을 읽고-

엄마는 잊을만하면 말한다. 너는 한 살 배기 때 따뜻한 물을 받아서 씻기기만 하면 똥을 쌌다고.

할 수 없이 꼭 욕조 물을 새로 받아야 했다고, 일 두 번 시키는 효녀라고 깔깔대며 웃는다.

따뜻한 물에서 온몸이 나른해지는 게 좋다. 아기 때도 그래서 똥을 싸질렀나 보다.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인 배설욕구를 마음껏 발사하는 과거의 나를 상상하면 후련하고 짜릿하다.


결벽증이 있는 할머니 덕분에 매주 일요일은 온 가족이 목욕탕을 가야 했다. 일곱 식구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하듯이 목욕재계를 했다. 며느리가 되어보니 엄마는 시어머니(나의 할머니)와 같이 가는 게 불편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단 한 번도 시자 붙은 사람들과 목욕탕을 간 적이 없다. 상상만 해도 부끄럽고 아찔하다. 벌거벗은 몸을 어떻게 보여주지? 그녀는 매주 갔으니 차츰차츰 적응했으려나?


엄마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할머니, 막내 고모(결혼해서 한동네에 살았다), 엄마, 동생, 나까지 '독수리 오 형제'같은 조합이 좋았다. 여자들만 똘똘 뭉친 느낌이었다. 일주일 동안 설레며 기다리는 일과 중 하나였다.


살이 벌겋게 익는 40도가 넘는 온탕, 목욕탕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냉탕, 숨을 쉴 수는 있나 두려웠던 한증막, 속옷만 입고 때를 밀어주는 세신사 아줌마, 달콤한 음료수들이 가득 차있는 진열대 등등.

언제나 똑같았지만 구경하는 맛이 났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찬물은 질색이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야 한다. 매주 갔지만 냉탕에 들어간 적은 다섯 번도 안된다. 그것도 억지로 어른들이 강요를 해야 들어갔다.


나른하게 만든 몸을 다시 바짝 수축시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고모와 할머니는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가야 피부가 젤리처럼 탱탱해진다며 두 시간 동안 계속 그 일을 반복했다.


'저러다 심장마비가 오면 발가벗고 구급차에 실려갈 텐데. 괜찮을까?'

온탕에 앉아 벌겋게 익어가는 내 살을 보며 이런 쓸데없는 걱정들을 했다. 십 분을 넘게 뜨거운 물에 앉아 있다 보면 손가락과 발가락이 쭈글쭈글 할머니처럼 된다.


외계인 피부로 보여 소름이 돋다가도 몸속에 나쁜 기억들이 수증기와 함께 증발되어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삼십 분 넘게 물속에서 때를 불리고 나면 엄마가 순서대로 우리 자매를 부른다. 그녀가 내 피부의 한 껍질을 얼굴 밑 목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벗겨낸다. 과거의 나는 끝도 없이 나오는 땟가루에 놀란다. 일주일 동안 이렇게 더러워질 수 있나? 짙은 회색의 때 뭉치들이 하얗게 바뀔 때까지 민다. 끊임없이 밀어도 왜 계속 때가 나오는지 어린 나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엄마가 됐다고 등을 찰싹 치면 얼른 탈의실로 달려갔다. 먼저 씻고 나와 평상에 누워있는 고모에게 '바나나우유'를 사달라고 졸랐다. 어쩌면 이걸 마시려고 목욕탕에 왔는지 모른다. 지금은 입도 안대지만 그때는 마지막에 꼭 이걸 마셔야 했다. 노란색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면 쪼그라들었던 내 몸이 다시 빵빵하게 원상 복귀된다고 믿었다.


그림책 <장수탕 선녀님>을 읽으며 그 시절이 그립다. 이 동네로 이사 와서 5년이 흘렀지만 목욕탕에 가 본 적이 없다. 처음 2년은 아는 엄마를 만날까 봐 두려워서 못 갔고 나머지 3년은 코로나가 시작되어 갈 수 없었다.


결국 우리 동네 목욕탕은 코로나 한파를 버티지 못하고 폐업을 했다. 뚜벅이라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야 목욕탕이 나온다. 그렇게까지 하기엔 귀차니즘이 발동한다. 과거에 내가 다녔던 추억의 목욕탕도 사라지고 그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섰다. 점점 보기가 힘들어지는 목욕탕들.


나른해지고 싶은데. 어쩔 수 없다. 화장실에 있는 욕조에라도 몸을 담글 수밖에. 비싼 입욕제로 바나나우유를 대신해본다.


-관련 그림책-

 덕지가 사는 동네에는 아주아주 오래된 목욕탕인 ‘장수탕’이 있습니다. 큰길에 새로 생긴 스파 랜드에는 불가마도 있고, 게임방도 있고, 얼음방도 있다는데….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덕지를 달고 장수탕으로 향합니다. 낡아빠진 사물함과 형형색색 목욕 바구니들, 야구 중계가 흘러나오는 고물 텔레비전과 음료수가 가득한 냉장고까지, 언제봐도 시시한 풍경이네요.



하지만 이 낡은 장수탕에도 덕지가 좋아하는 것이 있어요. 울지 않고 때를 밀면 엄마가 사 주시는 달콤하고 시원한 요구르트와 냉탕에서 하는 물놀이 입니다. 오늘도 감기걸린다고 잔소리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풍덩풍덩, 어푸어푸' 신나게 물장구를 치는데, 문득 뒤를 돌아보니, 이상한 할머니가 덕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어요! 토끼 귀를 닮은 머리 모양에,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는 자기가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님이라고 속삭이는데, 냉탕에 나타난 이 이상한 할머니는 진짜 선녀님일까요?



『구름빵』, 『달 샤베트』 등의 동화로 일상의 틈새에서 판타지를 꽃피우는 작가 백희나의 신작 『장수탕 선녀님』은 '목욕탕'을 소재로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일깨웁니다. 주인공 덕지처럼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아이들은 책 속에서 선녀 할머니와 한바탕 신나게 놀면서 짜릿한 모험을 즐기고, 따뜻한 위안을 받고, 풍부한 감성을 키워 가지요.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용기와 자신감을 얻기도 합니다. 『장수탕 선녀님』은 어린이들만의 상상의 세계를 만나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놀이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출처 예스 24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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