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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Apr 12. 2023

선명한 밤

-달빛, 만화책 그리고 라디오-

나는 종종 밤이 낮보다 더 선명하고 강렬하다고 생각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너는 낮에는 온종일 자다가 밤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 해지는 아기였어. 너를 보러 온 손님들이 아기가 잠만 잔다고 순하다고 했었지. 하지만 밤만 되면 잠을 안 자니 엄마는 참 피곤했다. 그래도 까맣고 동그란 네 눈동자를 보면 그런 것쯤이야 눈 녹듯이 사라졌지.”


태어났을 때부터 밤이 좋은 아이였다. 한낮의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분위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뜨거운 햇볕보다는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이, 달빛의 은은함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밤 10시쯤 되면 나를 제외한 여섯 명의 가족들은 대부분 잠이 든다. 할머니가 전기세 아낀다고 불을 다 꺼버리고 집안은 어둠이 잠식한다.


그 시간만 기다려온 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라디오를 켰다. 쉽게 질려하는 성격이라 애청하는 주파수는 없었지만, 전축의 다이얼을 맘에 드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까지 이리저리 돌렸다. 그래도 귀에 꽂히는 음악이 없으면 고모들이 사놓은 레코드판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팝송을 틀었다. 중학교에 가서야 영어를 배웠으니 어린이가 영어 가사를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열두 살의 허세이다. 가요보다는 팝송을 듣는 자신이 근사하게 느껴져 뜻도 모르는 가사를 흥얼거렸다.


마음에 드는 음악을 고른 후에는 동네 책 대여점에서 빌린 불법 유통된 일본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집에서 책만 읽으니 어린이가 어린이답지 못하다고 엄마가 직접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을 빌려와 읽어보라고 했다. 친구 같은 엄마? 불량엄마? 아무튼 그녀로 인해 만화책이라는 신세계에 빠지기 시작했다.


티비에서 다락방이 나오는 장면을 어쩌다 보게 되면 만화책 속 여자 주인공이 됐던 그 날밤이 떠오른다. 전축에선 달콤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다락방과 연결된 옥상 창문에선 레이스처럼 하늘거리는 달빛이 비친다. 사춘기가 시작되어 이마에 좁쌀 여드름이 오돌토돌 솟은 여자아이는 뜨뜻한 전기장판에 엎드려 배를 지진다. 어느새 여자 주인공이 되어 슬퍼하고 좌절하며 이유 없이 괴롭히는 악역들에게 욕을 하며 울다가 웃기를 반복한다.

토요일 저녁에는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일찍 자라는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나는 알아서 잘하는 아이라고 믿고 있었나? 아니면 두 분 다 삶에 지쳐서 자신의 아이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나? 두 이유가 다 아니래도 그런 부모님에게 감사하다.


밤이라는 고요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기에. 사춘기가 무난하게 지나갔다. 적막한 밤, 음악, 만화책 이 세 가지가 힘들 때 숨을 수 있는 달팽이 집이 되었다. 유리 멘탈인 내가 조각조각 파편화되지 않도록 지켜줬다.


다락방에 앉아 창문에 보이는 달을 보며 친구처럼 대화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대학교에 가서 만날 남자친구의 얼굴, 결혼하면 살고 싶은 집 등등. 무안도 주지 않고 소문도 내지 않을 대나무 숲 같은 달이었다. 완벽했다 모든 것이. 밤이 되면 슈퍼 물약을 들이켠 것처럼 정신이 선명해지고 몇 시간을 앉아있어도 끄떡없었다. 감성은 말랑말랑해지고 초 집중력이 발휘되는 마법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열두 살의 소녀는 심연의 어딘가로 숨어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더 이상 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다. 잠이 없는 예민한 녀석, 두 시간에 한 번씩 깨버리는 아이가 나의 밤을 꿀꺽 삼키고 태어났다. 이 예민이는 작은 기척에도 쉽게 깨버리더니 지금도 여전히 새벽 6시만 되면 눈을 뜬다.


새벽형 인간인 남편의 유전자를 빼 박았다. 그렇게 십 년을 넘게 두 남자의 생활 패턴에 서서히 맞추다 보니 나도 아침형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밝은 밤, 낮보다 선명한 밤을 볼 수 없다. 열 시 전에 잠이 들어버린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낼 수 없다. 병든 닭처럼 고꾸라진다. 이렇게 된 거 남은 인생은 새벽형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지만, 달이 사라지는 새벽은 밤처럼 강렬하지 않다. 낮보다 선명한 밤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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