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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Oct 11. 2023

이제는 당신과 이별해야 할까요?

"웩~ 우웩~!"

새벽 4시 30분.  변기통에 머리를 숙이고 구토를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 저 군요.

어제는 참 피곤한 하루였습니다. 뻔한 말이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6일이라는 긴 명절 연휴가 전혀 즐겁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명절 아침마다 차례를 연이어서 두 번 지내는 시댁에 아직도 적응을 못하고 있는 13년 차 며느리입니다.


새벽 6시부터 시작해 오전 10시에 끝나는 추석 당일 바짝 얼어있는 긴장감은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손끝이 야물지 못한 사람이라 제사 때마다 날이 서있는 어머니께 꾸중을 듣습니다. 혼나기가 싫어서 계속 눈알을 굴리고 있는 스스로가 짠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매운맛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문제는 고추파전이었습니다.


분명히 머릿속에 고추나 마늘이 들어간 음식은 제사상에 올리지 못한다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상관이 없다며 올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안된다고 했고 어머니가 괜찮다고 역정을 내니 제사상에 자리가 없다고 핑계를 대셨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화살이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왈, 호박전과 파전을 한 제기에 담아야지 따로 담으니 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에 말문이 막혀서 또 가만히 있었습니다. 한마디 대꾸도 못한 게 속상했던 건지, 4시간 동안 지내는 차례가 피곤했던 건지 아니면 추석 전날 5시간 전 부치기 한다고 심해진 허리 통증이 짜증이 나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친정집에 도착해서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동생네 식구와 술판을 벌였습니다. 우리는 BTS 정국이 마셔서 유명해졌다는 비고르 와인을 한 병들고 갔고 동생네는 아사히 슈퍼드라이 한 박스와 서울의 밤이라는 증류식 소주 한 병을 들고 왔습니다. 일을 시작하면서 퇴근 후 꼭 한 잔을 먹어야지 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알코올이라는 늪에 잠식된 걸까요? 천천히 마셔야 하는데 안주는 과자만 놔둔 채 삼십 분 만에 와인 한 병을 끝냈습니다. 그다음은 소맥을 만들어서 두 캔을 연거푸 마셨고 엄마가 사놓은 하이볼 캔까지 마시고 나서는 필름이 끊겼습니다.


눈을 뜨니 새벽 4시 30분. 심한 갈증과 함께 오장육부가 거꾸로 뒤집히는 고통에 일단 냉수를 벌컥벌컥 연거푸 두 잔을 마셨습니다. 물이 들어가니 하수구가 역류하듯이 구역질이 났고 입을 틀어막으며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안주는 딱히 먹은 것이 없어서 정체불명의 액체들만 입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의 구토 소리는 곤히 자고 있던 친정 식구들을 모두 깨웠고 남의 편만 세상 편하게 코를 골며 자더군요. 얄미운 000~욕이 절로 나오네요.

엄마는 아빠를 시켜 편의점에 가서 숙취 해소제를 사 오게 했습니다. 저는 그것마저 먹자마자 토했습니다. 그다음은 제부와 동생이 각각 다른 편의점에 가서 숙취약을 사 왔습니다. 이제 제부 얼굴을 어떻게 보나요? 망신살이 제대로 뻗쳤네요. 부모님 계속 구역질을 하는 모습이 걱정되어서 응급실에 가라고 했지만 이 모든 상황이 한심한 저는 못 들은 척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속이 편안해졌고 딸이 원래대로 돌아오니 엄마의 잔소리가 귓전으로 날아옵니다.


"대학교 1학년때도 이렇게 인사불성이 돼서 응급실에 실려 가더니 잘한다 잘~~ 해. 그때 계단에서 넘어진 거 기억나쟤? 구르는 너 잡다가 엄마도 손목 나갔다. 아들 앞에서 엄마가 돼가지고 뭐 하는 짓이고? 00가 어제 엄마 술 취한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아나? 아들한테 쌍욕을 날리고 신랑 머리를 그렇게 때리니 속이 좀 시원하드나? 다시는 술 입에도 대지 마라 이년아!!"

"... 기 하나도 안 나는데? 내가 그랬다고?" 거짓말입니다. 중간중간 쇼츠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하도 신랑 머리를 퍽퍽 때리니 아빠가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스쳐 지나갑니다.


부모님이 술을 먹는 모습이 그렇게 싫고 원망스러웠는데 우리 아이에게도 비슷한 기억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이제 아이는 엄마 아빠가 술을 먹는다고 하면 두 팔 걷어 말릴 것입니다. 예전에는 소주 두 병도 거뜬했는데 '나이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은 진리였습니다.

이젠 당신과 이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의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습니다. 제가 당신을 견디지 못해서 놓아줄게요. 저에게 맞는  더 순한 존재를 찾아야 될 것 같아요. 부디 저를 원망하지는 말아요.

ADDIO SO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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