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방별곡 Mar 14. 2023

콩국수

-그림책 <팥빙수의 전설>을 읽고-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어느 여름날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콩국수를 찾는 이유가 시작된 날이 떠오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놀리기만 하면 울어버리니 짓궂은 사내 녀석들이 참 많이도 괴롭혔다. 그날도 집에 가려고 실내화를 갈아 신는 중이었다. 같은 반 남자애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나를 놀려댔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무시하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놈이 발을 걸었다. 오른손에는 실내화 주머니, 왼손에는 준비물 가방을 들고 있었기에 미처 손을 짚지 못했다. 순발력이 없는 아이였다. 결국 얼굴과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그대로 부딪혔다. 눈앞이 아찔하고 순간 섬광이 보일 정도로 아팠다. 고개를 드니 입에서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피가 난다며 꺅꺅 소리를 질렀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피가 난 적은 처음이었기에 무서워서 울기 시작했다.


반장이 침착하게 나를 일으켜 세워 양호실에 데려갔다. 발을 건 놈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한 시간가량이 흐른 후 일을 하던 엄마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앞니 하나가 반토막이 되어서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부러진 치아를 우유에 넣어서 엄마와 함께 근처 치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 왈, “영구치지만 아직 자라고 있기에 성인이 돼서 치료하는 게 좋습니다. 당분간은 부러진 채로 놔두어야 해요.” 그 말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아홉 살 인생 최대 고비였나 보다. 황당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이가 부러져 꼭 맹구, 영구, 바보, 칠뜨기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생활해야 한다고??? 엄마는 한참을 선생님과 얘기한 후 우울한 표정으로 나와서 대기실에 앉아있던 내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마자 알 수 있었다.  ‘별 방법이 없구나.’


실망한 나는 그때부터 또 울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학교에 안 갈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처음으로 엄마 앞에서 욕도 했다. 그 개새끼 죽여 버릴 거라고. 엄마는 놀라지도 않고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배고프지? 우리 콩국수 먹으러 가자.”라고 짧은 말을 내뱉었다.

엥? 방금 욕했는데 혼을 안 내네? 왜 저러지? 살짝 눈치를 보며 앞서가는 엄마를 따라갔다. 도착한 식당은 시장 안 골목에 있는 허름한 곳이었다. 김밥이 먹고 싶어서 콩국수 말고 그거 사달라고 졸랐다. 메뉴판에 적혀있는데도 엄마는 앞니가 부러져서 당분간은 딱딱한 것은 먹기가 불편하니 계속 콩국수를 권했다. 안 그래도 콩 싫어하는데 그 맛도 없는 것으로 국수를 만들었다니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엄마와의 기싸움에서 졌고 큰 스테인리스 대접에 담긴 죽처럼 보이는 음식이 내 앞에 놓였다. 걸쭉하고 텁텁한 느낌이었다. “이거 무슨 맛이야? 정말 맛있어?” 의심의 눈초리로 콩국수를 바라보며 젓가락을 들지 않는 내게 엄마는 “그럼 진짜 맛있어. 이 아픈 거 기억 안 날걸.”이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는 콩국수와 같이 나온 접시 위 하얀 가루를 한 숟가락 떠서 콩국수에 넣었다.

“그 이상한 건 또 뭐야? 왜 넣어?” 마음이 꼬일 대로 꼬여서 계속 빈정거렸다.

“설탕인데 이걸 넣으면 두 배로 맛있어져. 꼭 넣어야 해.” 엄마는 화도 한 번 안 내고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이런 엄마가 아닌데, 화를 내야 하는데…. 오늘따라 착하고 다정한 엄마를 바라보며 마지못해 국수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다.


면발을 오물거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차갑고 달콤하며 부드러운 맛이었다. 콩을 갈아서 만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 건지 신기했다. 그전까지 콩으로 만든 건 다 싫어하는 아이였다. 콩밥, 콩조림, 두부로 만든 반찬들, 심지어 된장찌개도 별로였었다. 콩 특유의 그 텁텁한 맛이 거슬렸다. 그런데 콩국수는 그렇지 않았다. 텁텁한 건 똑같은데 설탕이 들어가서 달콤했다.


차가운 얼음이 띄어져 있었지만, 냉면처럼 이가 시리지도 않았다. 면발보다도 국물이 더 맛있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콩국물을 계속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술술 넘어갔다. 어느새 이가 부러진 아픔도.. 영구처럼 되어버린 내 얼굴도 까먹고 말없이 콩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엄마는 딸내미가 콩국수를 좋아할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게 콩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콩국수를 사준 엄마의 신의 한 수가 아직도 신기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름이 시작되면 콩국수를 찾게 된다.

그림책 『팥빙수의 전설』을 읽으며 팥빙수 대신 콩국수가 떠올랐다. <팥죽할멈과 호랑이>라는 전래고전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림책이다. 눈호랑이가 할머니를 잡아먹으려고 애를 쓰지만 마지막에 할머니가 만든 팥죽을 먹고 사르르 녹아 버린다. 그리고는 뱃속에 있던 여러 과일과 어우러져 팥빙수가 되어버렸다는 다소 오싹하면서도 귀여운 이야기다.


콩국수는 하얀 국물의 채 썬 오이가 올라간 소박하고 깨끗한 느낌의 음식이지만 나는 그것을 먹으며 앞니를 부러뜨린 놈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학창 시절 내내 그놈을 찾아내 콩국물처럼 갈아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럴 때마다 녀석의 등골은 오싹 했겠지. 이 그림책을 읽으며 콩국수가 된 그놈을 상상했다.(공포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보는 횟수를 줄여야겠다)


성인이 돼서 라미네이트를 하기 전까지 항상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말을 할 때도 입을 최대한 작게 벌렸다. 안 그래도 조용한 아이였는데 더 과묵해졌다. 말하기가 싫었다. 다 내 부러진 앞니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엄마는 학년이 바뀌면 꼭 친해진 반 여자애들을 두서 명 집으로 초대해 나를 부탁했다. 남자애들이 놀리면 딸내미는 울어버리니 너희들이 같이 싸워주라고. 당시에는 그런 부탁을 하는 엄마가 쪽팔렸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보니 그때의 엄마 마음이 이해된다. 딸내미가 입을 벌릴 때마다 마음에 턱 걸렸겠지.


이제는 부러진 앞니 자리에 임플란트가 있고 원한도 증오도 사라졌다. 대신에 콩국수를 먹으며 치유를 한다. 7월부터 8월까지 거의 매주 한 번씩은 먹는다. 어린 시절 제대로 입 벌리며 웃지도 못했던 나를 위로한다.

엄마와의 달콤 쌉쌀한 추억(내가 계속 틱틱거려도 화를 안 낸 유일한 날이었다), 어린 시절 외모 트라우마가 뒤섞여 단짠단짠 맛이 나는 영혼의 음식 콩국수를 먹을 여름을 기다린다.


이전 03화 매주 일요일 오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