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마냥 며느리의 의무는 여전하다. 단어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위라는 어휘는 당당한 느낌인데 며느리는 왠지 종속된 느낌이다. 네이버에 어원을 검색하니 역시나기생한다는 뜻의 '며늘'과 '아이'가 합쳐진 말로 '내 아들에 딸려 더부살이로 기생하는 존재'라는 의미이고 철저한 남존여비 사상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반면에 사위의 어원은 ‘내가 이 여자를 임신시킨 남자입니다.’라는 뜻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더욱더 호구 며느라기 팔자는 영원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만취한 채 경찰차에 실려와서 화장실에 엎어진 남편을 그대로 놔두고 침실로 자러 갔다. 등짝을 사정없이 때리고 싶었지만 심호흡을 하며 참았다. 모닝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화장실 바닥은 구토물로 엉망이었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 아이는 그런 아빠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이 보였다. 같이 흉을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빠니까 두둔을 또 해주었다.
"아빠가 길에서 나쁜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쩔뻔했어~하늘이 도우신 거야. 그치?" 아이는 "응." 짧게 대답하더니 시리얼을 우적우적 씹었다.
녀석이 등교를 한 후 새벽에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댁 큰집 사촌 형님께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통화를 해야 하나? 말주변이 없으니 "음, 저... " 얼버무리기보다는 문자를 보내는 게 낫겠지? 아니야, 싹수없이 보일 수 있으니 차라리 할 말을 글로 쓰고 그대로 읽을까?
30분을 전화기를 들고 고민했다. 답답하고 소심한 내게 화가 났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고민하는 거야? 결단을 내리자.
'큰 형님, 안녕하세요? 저 00 엄마예요. 새벽에 주무시다가 경찰관이 전화해서 너무 놀라셨죠? 정말 죄송해요ㅠㅠ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제가 폰을 진동으로 해놓고 거실에 놔둬서 전화를 못 받았어요. 그래서 경찰관이 아주버님께 전화했나 봐요. 다시 한번 형님과 큰 아주버님께 죄송합니다.'
카톡을 쓰면서 전화를 거실에 놔둔 나를 원망했다. 일 년에 몇 번 보지 않는 시댁 큰집에 모든 사람들이 수군거릴 모습이 아른거렸다. '도련님이랑 동서가 대판 싸운 거야. 싸우고 도련님이 집 나가서 술 마신 거야. 그러니까 전화를 안 받았지. 결혼한 지 십 년 넘었으니 권태기 올 때 됐지. ‘
혼자 소설을 써 내려갔다. 한 일 년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큰 아버님댁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쪽팔리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잘못 쓴 내용이 없는지 두 번, 세 번 읽은 후 전송 버튼을 눌렀다. 둥글둥글 순한 인상에 사촌형님은 톡을 보내자마자 답문 대신 전화를 하셨다. 우리는 다 이해하니 도련님 잘 챙겨주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통화가 끝났다. 1단계가 수습되었다.
2단계는 시부모님께 전화드리기였는데 이미 갈팡질팡하며 진이 빠질 대로 빠져버렸다. 게다가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마음대로 넘겨짚게 만들었다.
'첫째 아들이 어른들과 같이 살지만... 말씀 안 드렸을 거야. 아버님께 말했다면 바로 전화 오셨을 텐데 지금까지 조용하잖아?' 시계는 이미 정오를 넘어 12시 30분이었다. 1단계만 수습한 채로 서둘러 학원에 출근했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약국에 들러서 남편의 숙취약을 샀다. 집에 오니 하루종일 토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초췌한 모습이었다. 약을 먹이고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 참 잘 지었네.' 조상님들의 센스에 감탄하며 퇴근 후 앉지도 못한 채 죽을 저었다.
그때였다. 남편의 전화벨이 울렸다. 불안감에 심장이 쿵쿵 미친 듯이 뛰었다. 시어머니의 전화였다. 남편 놈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응.. 응 대답만 하더니 나에게 폰을 넘겼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가식적인 목소리로 거짓말을 시작했다.
"어머니~ 아침에는 00 아빠가 계속 토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퇴근 후 전화 드리려고 했어요. 많이 놀라셨죠?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겠어요. 큰 병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돼요."
모진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애교쟁이 막내아들이 걱정되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병원에 한 번 데리고 가라고, 네가 고생이 많다는 말만 하더니 끊으셨다. 욕을 한 바가지 들을 줄 알고 괜히 겁부터 먹었다. 쉽게 2단계가 끝이 났다.
그러나 5분 후 이번에는 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번호는 아버님이었다. 평소에 화도 안 내시고 어머니와는 정반대 스타일이시라 긴장이 되지 않았다. 잔소리만 몇 마디 하시겠지? 짐작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아버님."
"니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쁘노? 안부전화도 거의 안 하고 어른들 편찮은 곳은 없는지 걱정도 안 되나? 오늘도 내가 언제 연락하나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전화 한 통이 없네? 00 아빠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어른들이 당연히 걱정하지 않겠나? 전화를 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을 해야지. 기가 찬다. 기가 차! 도대체 느그들 무슨 정신으로 사노?!"
"네, 네... 죄송해요. 아버님."
이번에도 어젯밤 경찰관 앞에서처럼 대역죄인이 되었다. 목이 메어서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결혼한 지 13년째, 누구보다도 온화한 아버님이 이렇게 역정을 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 전화를 끊고 방에 들어가 울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아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데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가 걱정돼서 방으로 들어온 녀석을 보니 더 조절이 안되어서 흐느꼈다.
남편이 아버님께 전화한다는 걸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며 뜯어말리고 한 시간을 울다가 방에서 나왔다. 일이 점점 힘들어져 퇴근 후, 주말 내내 소파에 누워있었다. 몸이 피곤하니 만사가 귀찮았다. 3주 정도 시댁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안부전화를 하지 않은 게 이렇게 혼날일인가? 과연 그 이유로 이렇게 대노하실까? 체면을 중요시하는 아버님이 큰집에까지 소문이 났으니 쪽팔리신 게 틀림없었다. 나의 잘못은 안부전화 30퍼센트+경찰관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 70퍼센트였다.
울면서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에도 억울함과 분노, 원망이 뒤섞여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유튜브로 슬픈 발라드를 틀어 놓고 또 울었다. 훌쩍 훌쩍이 아니라 엉엉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는 왜 우냐며 할아버지께 또 혼났냐고 걱정했다. 노래가 슬퍼서 눈물이 난다고 얼버무렸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독수리 팔자는 면했는데 호구 며느리 팔자는 벗어나지 못한다. 언제까지 시댁에 가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쩔쩔 매야할까? 이제는 전업주부가 아니라 돈을 버니 연락을 자주 안 드려도 이해하실 줄 착각했다. 남편은 친정에 일 년 내내 전화 한 통 안 하지만 욕을 먹지 않는다.
결국은 도로아미타불. 글쓰기로 이렇게라도 속풀이를 했으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독수리보다는 이 팔자가 낫다고 바보같이 스스로를 위로한다. 또다시 일주일에 한 번씩 안부전화를 하는 중이다. 앞으로 십 년 후에는 호구 며느라기 팔자에서 벗어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