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쓰는 편지
엄마, 고등학교 때 어버이날 이후로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막상 당신께 편지를 쓰려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은 무심코 흘러서 저는 그때의 당신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많이 원망했고 당신의 고통을 모른 척했습니다. 결혼을 통해 원가정의 부서진 울타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들, 내가 이룬 가정에 전념했습니다.
시댁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하려고 노력하면서 당신에게는 먼저 연락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두 달에 한 번 특별한 날이 아니면 친정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회피주의자인 나는 계속 도망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딸을 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많이 서운 했겠죠...? 얼마 전 코로나에 걸려 아파하는 저를 위해 좋아하는 음식들만 만들어서 집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서둘러 간 당신을 보며 또 울었습니다. 야속한 딸이 뭐가 예쁘다고 모처럼 쉬는 날 달려온 건가요?
6년 전 통화를 하며 아빠는 당신이 끝까지 책임질 테니 너희는 너희끼리 잘 살아라 라는 말을 수화기 너머로 들었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야, 엄마가 다 짊어지려 하지 마. 힘들면 벗어나요. 그렇게 해도 그 누구도 욕 안 해. 그리고 엄마의 인생을 살아. 우리 걱정은 더 이상 하지 마요."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지만 끝내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못난 딸입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당신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까지 반에서 반장을 도맡아 하는 타고난 리더였고 문학을 좋아했던 소녀는 국어 선생님이 꿈이었습니다. 언젠가 책 대여점에서 빌린 '남자의 향기'라는 소설을 같이 읽으며 당신이 툭 내뱉었던 그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엄마는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그러나 70년 대 평범한 집들이 그렇듯이 아들 두 명을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기 위해 큰 딸의 꿈까지 챙기기 버거웠던 당신의 어머니는 끝내 등록금을 주지 않았죠.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은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그렇게 문학소녀는 고향으로부터 3시간 이상 떨어진 부산에서 경리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당신의 꿈이 선명했을까요? 이제는 노안이 와서 글자도 잘 안 보이고 편두통이 점점 심해져 책을 더 이상 읽지 않는 당신을 보며 서글퍼집니다. 삶의 무게가, 우리가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남겨진 자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지만 저는 이제야… 그때의 당신만큼 살아보니 이해가 됩니다. 남겨질 우리를 걱정하는 것보다 마음의 고통이 훨씬 더 컸다는 것을요. 친정식구들은 일 년에 한 번 보지도 못했죠. 홀로 부산에 떨어져 큰딸이라는 역할 대신 이번에는 맏며느리라는 짐을 짊어지고 모진 시집살이를 했던 당신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삶의 동반자가 되지 못했던 남편을 바라보며 밤마다 몰래 소주를 들이켰던 당신이 떠오릅니다. 그때도 근처에 가면 독한 알코올 냄새가 나는 당신을 저는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습니다. 입 밖으로 내버리면 당신이 먼지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죄책감 가득한 편지를 쓰면서도 제가 도망치는 것을 멈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연락을 하는 것도, 자주 찾아간다는 것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제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나의 엄마보다는 한 여성으로 이해합니다.
'인옥 씨, 당신은 아슬아슬했지만 끝끝내 버텼고 지금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어요. 고마워요. 우리 곁에 있어줘서. 아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애정을 주는 외할머니가 되어줘서. 국어선생님이라는 꿈 대신 지금은 어떤 꿈이 가슴속에 있을지 묻고 싶네요. 사랑해요 당신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