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 것도 보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어린 시절 앨범을 뒤적이며 소재를 찾는다. 사진 속 꼬마는 치아를 드러내며 환히 웃고 있는데 배경 속 집들이 자주 바뀐다. 10살 때였나 엄마에게 물었다. 왜 계속 집이 바뀌냐고, 그러면 엄마는 남 얘기하듯이 시크하게 대답했다. 아빠가 돈 사고를 많이 쳐서 이사를 자주 갈 수밖에 없다고. 집들은 단칸방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서울살이를 할 때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반지하 방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의 집들과 달리 출입구가 두 개라서 꽤 마음에 들었다. 일반적인 대문과 주인집 정원과 연결된 큰 창문, 엄마는 대문을 놔두고 창문으로 다니는 거 아니라고 만류했지만 반친구들에게 우리 집의 멋진 문을 자랑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들은 가장 먼저 창문을 통과하고 싶어서 줄을 섰다. 금지된 담벼락을 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반장의 집에 놀러 간 순간 우쭐함은 산산이 부서졌다. 장미꽃이 활짝 핀 마당과 핑크색 침대, 붉은 벽돌 이층 집에 사는 반장은 공주, 어두컴컴한 반지하에 사는 내가 마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부산에 이사를 올 때까지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부산에 오면 핑크색 침대를 가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달빛이 비치는 다락방은 동생과 나의 책상 두 개를 놓으면 꽉 찼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이 들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침대를 사는 것이었다. 핑크색 공주풍은 아니었지만 한을 풀기 위해 혼수품 중에서 제일 비싸게 500만 원 정도의 값을 치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신혼집을 아파트에서 시작할 줄 알았는데 시댁 어른들도 남편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나 또한 고시공부를 하다가 급하게 결혼을 했던 상황이라서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결국 방이 한 개, 거실 겸 주방이 한 개인 투룸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대출을 받아서 산 혼수품들이 투룸에 어울리지 않았다. 750리터 냉장고는 부엌을 모두 차지했고 내 꿈이었던 침대는 방을 모두 차지해 전혀 집과 어울리지 않았다.
집들이를 온 친구들은 왜 아파트를 고집하지 않았냐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친구들은 모두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웃으며 투룸도 나쁘지 않다고 얼버무렸지만 반장집에 놀러 갔을 때의 패배감이 다시 느껴졌다. 2년의 전세기간이 끝나자마자 남편을 졸라 쓰리룸으로 이사 갔다. 신축빌라라 깨끗했지만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놀이터도 없고 주변에 아이 친구들도 없었다. 십 년 대출을 받아서 2번의 이사를 더 한 결과 지금의 아파트에 정착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던 이사와 남의 집살이는 끝이 났고 침대의 자리를 드디어 찾았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친구랑 놀다가 싸웠나? 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우리 집이 제일 작아. 친구집은 거실도 방도 엄청 커."
우리 집은 25평, 친구집들은 대부분 30~40평대였다.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 대꾸했다.
"걔는 4명이 한 집에 살아서 그런 거고 우리는 3명이잖아. 그러니 절대 작은 게 아니다. 그리고 집이 크면 엄마 청소하기 힘들어서 안된다."
"내가 청소 도와줄게. 우리도 넓은 집으로 이사 가자."
"엄마 아빠 돈이 없어서 이사 못 한다.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한다."
단호하게 차단했지만 9살 때 친구네 집에 주눅들어 온 너와나 우리 두 사람이 참 웃픈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