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 두대이다. 한 대는 산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흰색의 양문형이다. 햇빛을 받아 바래진 상아색에 가까운 그곳에는 소주 한 병, 구토를 자주 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게워내지 않는 호박죽이 들어가 있다. 다른 한 대는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은색의 김치냉장고이다. 이곳은밥을 먹을 때 김치가 꼭 필요한 Y를 위해 직접 담근 배추김치, 파김치, 깍두기 등으로 꽉 채워져 있다.
냉장고마다 가족이 아닌 낯선 남자들의 사진이 붙어있다.
그녀가 애정하는 트로트 가수들의 사진이다.
그들의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놓고 매일매일 바라보며 행복해한다. 한 사람의 따뜻한 미소와 다른 한 사람의 잘생긴 얼굴은 그녀에게 소소한 위로와 기쁨을 준다.
그녀는 얼굴 흉터가 매력적인 보조개로 바뀐 남자의 콘서트가 열릴 때마다 티켓을 구하기 위해 동동거린다. 새벽부터 줄을 서기도 하고, 딸들에게 부탁해서 온라인 예매 전쟁에 뛰어들기도 한다.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무대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팬클럽에도 가입하여 다른 팬들과 함께 활동을 응원한다. 하늘색 모자와 스카프를 한 채 팬미팅에 참석하여 그와 포옹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다른 한 사람 역시 그녀에게는 특별한 존재다. 텔레비전에서 그가 나오는 장면은 OTT까지 구독하여 인터뷰나 예능 프로그램도 빠짐없이 챙겨본다. 팬사인회가 열리면, 직접 보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사인을 받고, 그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는 순간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그녀에게 구체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다. 짐작건대 이런 대화들이 오갔을 듯하다.
"안녕하세요, P 씨! 저는 정말 오랫동안 당신의 팬입니다. 오늘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너무 좋아요." "안녕하세요!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팬분들을 직접 뵐 수 있어서 저도 너무 행복해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K라고 해요. 제 이름을 적어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K님. (사인하면서)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하세요?" "저는 '깜빡이를 키고 오세요'를 정말 좋아해요. 그 노래를 들으면 항상 기분이 좋아져요." "아, 좋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도 좋은 노래 많이 들려드릴게요. 혹시 사진도 같이 찍으실래요?" "네, 영광이에요!" "(사진을 찍은 후) K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계속 응원할게요. P님 파이팅!"
이제 그녀의 집 냉장고는 단순히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열정이 담긴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오늘도 냉장고 앞에서 보조개 맨의 노래를 들으며 미소를 짓고, P의 예능을 보며 저런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흘린다.
K의 이러한 열정은 때로는 가족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한숨을 쉬게 한다. Y는 운전을 못하는 그녀를 위해 콘서트나 팬클럽 모임에 데려다주면서도 딸들 앞에서는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준다.
큰딸은 아버지의 핀잔을 묵묵히 듣지만 희미하게K의 마음이 이해된다.
그녀가 사춘기 소녀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덕후 생활을 왜 뒤늦게 하고 있는지.20년 넘게 먹고 있는 우울증 약과 불면증 약으로초점이 흐려진 두 눈, 무표정했던 얼굴과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약복용 횟수가조금은 줄었다. 두 남자가 처방된 수면제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고마움을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