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의 당근
사춘기는 참 낯설고도 예민한 계절이다. 그것이 아이에게 닥쳐올 땐, 엄마도 함께 흔들린다. 딸은 요즘 부쩍 지쳐 있었다.
“엄마, 저 놈이 지 방에 틀어박혀 말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나한테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전화기 너머로 탄식을 뱉는 딸의 숨결을 들으며, 마음이 쿡쿡 저려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춘기가 찾아오면 아이는 세상과도, 엄마와도 거리를 둔다. 엄마는 벽이 되고,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된다. 하지만 그때 가장 필요한 건 잔소리가 아니라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이라는 걸, 그녀는 오래전 엄마에게서 배운 바 있었다.
“걔 감자탕 좋아하지 않았나? 고기 뜯는 재미에 밥 한 공기 뚝딱하잖아.”
그녀는 손자가 감자탕 먹으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곧장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 오고 다음날 아침부터 뭉근하게 감자탕을 끓였다. 큼직한 돼지등뼈를 사다가 핏물을 빼고, 파, 마늘, 된장, 고춧가루를 아낌없이 넣었다. 국물이 자작하게 우러날 때쯤, 푹 삶은 시래기를 넣고, 들깨가루를 풀어 마지막 풍미를 더했다.
감자탕이 익어가는 동안 겉절이도 무쳤다. 배추를 찢어 넣고, 고춧가루, 멸치액젓, 다진 마늘에 손맛을 얹었다. 딸이 말했었다.
“엄마, 나는 쉰 김치, 묵은지 이런 게 좋은데 걔는 꼭 지아빠 닮아서 풋내 나는 겉절이를 좋아한다.”
그녀는 손수 만든 감자탕 한 냄비, 겉절이를 반찬통에 넣고, 아이스팩을 담아 천가방에 챙겼다. 그리고 아파트 정문 앞에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는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환승을 두 번 하고, 버스를 다시 갈아타며 그녀는 2시간 가까운 거리를 묵묵히 걸었다. 땀이 이마에 맺혔고, 무거운 가방끈은 어깨를 아프게 눌렀지만, 마음만은 단단했다.
현관문의 초인종을 눌리자 딸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엄마, 웬일이고 이 무거운 걸 들고…”
“당근 전략이다, 인자. 혼내봤자 뭐하겠노. 일단 입부터 즐겁게 해 줘야지.”
책상에 틀어박혀 있던 중2 외손자가 냄새에 이끌려 나왔다.
“안녕하세요.”
그녀만 보던 방긋방긋 웃던 아이는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보이고 말수가 적은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감자탕을 보더니 입꼬리가 그제야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말없이 국자를 들어 국물을 푸고, 뼈 한 덩이를 덜어 주었다.
“야야, 이거 한 번 먹어봐 봐. 겉절이에 밥 넣고 고기랑 같이 싸 묵어라. 할매가 니 먹이려고 2시간 걸려서 왔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 순간 그녀는 알았다. 한 그릇의 따뜻한 밥상이 말보다 깊이 닿는다는 것을. 딸의 지친 눈에도 다시 힘이 돌았고, 사춘기 외손자의 입에서도 ‘고마워요’라는 말이 나왔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맛은 마음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