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된장 콩잎 장아찌

경상도에만 있다고?!

by 책방별곡

부여 들판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스무 살 무렵까지 콩잎이라는 걸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 넓디넓은 논두렁과 고샅길을 매일같이 걷고도 말이다. 어머니의 식탁에는 콩잎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스물셋, 부산으로 시집온 첫여름날에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마주하게 된다.

시어머니는 장독대에서 시커먼 잎사귀를 꺼내 밥 위에 척 올리며 말씀하셨다.
“니는 이 귀한 거 먹어본 적 없쟤? 요래 싸 묵어봐라. 밥도둑이 딴기 아이다.”

그녀는 그 말에 한 장을 젓가락으로 들어 입에 넣었지만, 곧 짭조름하고 쿰쿰한 된장 향에 눈을 찡그렸다. 도무지 입에 붙지 않았다. 차라리 풋고추나 깻잎이 낫지, 저 눅눅하고 짠 콩잎은 도통 정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딸에게서 일어났다. 열한 살이던 큰 딸은 여름만 되면 차가운 보리차에 밥을 말고 된장콩잎을 밥 위에 올려 오물오물 씹었다.
“엄마, 이렇게 먹으면 두 그릇도 먹을 수 있겠다!”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그 쿰쿰한 맛을 아이가 이렇게 좋아하다니. 입맛이 덜 자라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 딸은 자라서 진해 용원, 바닷바람 부는 동네에 신혼집을 꾸리게 되었다.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임신 소식을 전해왔고, 입덧이 몹시 심하다는 말에 그녀는 콩잎을 떠올렸다.

김치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내 뚜껑을 열자, 푹 익은 된장 냄새가 짙게 퍼졌다. 손끝에 묻은 된장 냄새는 아스라한 여름날 장독을 열던 시어머니의 손과 겹쳐졌다.


미리 데쳐둔 콩잎을 가지런히 펴고, 다진 마늘과 홍고추, 매실액 등을 넣은 된장에 콩잎을 한 장씩 정성스레 재웠다. 된장의 짠 향, 콩잎 특유의 풋내가 섞이며 부엌 안이 옛날 냄새로 가득 찼다. 손가락 끝에 머무는 미끌한 감촉, 콩잎을 덮을 때 나는 사각거림, 그 모든 게 마치 시간이 반죽해 낸 한 편의 기억처럼 오롯했다.

그녀는 그것을 챙겨 신혼집으로 향했다. 딸은 여전히 입덧에 시달리며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다. 조용히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지어 찬물에 말고 콩잎을 그릇에 담은 뒤 소박하게 한 상을 차렸다.

“니, 아직도 아무것도 못 묵고 있나?”
“어… 엄마, 냄새만 맡아도 속 뒤집어진다.”
그녀는 웃으며 밥 위에 콩잎 한 장을 척 올렸다.
“이거, 엄마가 니 좋아하던 거 해왔다. 함 먹어봐 봐.”

딸은 흘끗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씹던 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와… 엄마, 이번에는 콩잎 잘 됐네! 진짜 옛날에 할머니가 해주던 그 맛이다. 내가 원하던 맛이 이거다 이거!”
“다행이네. 니 어릴 때 여름만 되면 맨날 달라 캐서 엄마가 숨겨놨던 거, 기억나나?”
딸은 배시시 웃으며 콩잎 한 장을 또 집어 들었다.
“기억나지~ 다른 거는 안 먹고 맨날 찬밥에 물 말아서 콩잎만 싸 먹어서 혼났잖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다. 그렇게 좋아했던 거, 엄마가 안 해줄 수가 있겠나… 니는 체하고 나은 날에도 꼭 이거 찾았잖아.”
딸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엄마밖에 없다. 진짜 살 것 같다.”

그녀는 딸의 반응에 씁쓸히 미소 지었다. 자신은 아직도 그 맛이 썩 입에 맞지는 않았지만, 그 콩잎 속엔 시어머니의 손맛, 딸의 입맛,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가족의 시간이 차곡차곡 절여져 있었다.
바깥 창문 너머, 바닷바람이 은은히 불어왔다.

콩잎 하나로 이어진 모녀의 식탁은, 세월을 품은 장아찌처럼 진하고 따뜻했다.


keyword
이전 05화여름 한 칸, 옥수수 두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