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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원한 밀면

모르는 도시, 익숙해지는 맛

by 책방별곡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첫 사회생활, 첫 자취방, 첫 출근.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다. 부산의 번화한 거리와 높다란 빌딩, 빨리 걷는 사람들, 사무실에서 오가는 말들도 그녀에겐 마치 외국어 같았다. 무역업체의 경리로 일하게 된 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오전 내내 계산서를 정리하며 숫자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숨죽인 긴장 속, 서류 하나를 잘못 입력했다는 이유로 과장의 목소리가 따발총처럼 쏟아졌다.

“김양아! 이 숫자 틀렸잖아.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노? 니 돌대가리가?”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책상 위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퇴근을 하자마자 그녀는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고, 누군가 따뜻한 말을 건네주길 바랐다. 그러다 발걸음을 멈춘 곳, 어스름한 저녁 불빛 아래 '00 밀면'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식당 문을 여는 순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육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고소하면서도 은근히 시큼한 냄새가 진동했다. 혼자 식당에 온 건 처음인지라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아줌마, 물밀면 한 그릇 주셔유.” 충청도 억양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흰 두건을 두른 노부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아따, 충청도 아가씨네. 혼자서 여행 왔나? 밀면 먹어본 적 없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그녀의 부은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와 눈이 퉁퉁 부었노? 울었는가베. 시원한 밀면 한 사바리 먹으면 다 내려갈끼다.”

잠시 후, 시린 철제 그릇에 담긴 물밀면이 그녀 앞에 놓였다. 투명한 육수 속에 얇고 탄력 있는 면발이 고요히 잠겨 있었다. 젓가락을 들어 한가닥 들어 올리자, 면발이 해묵은 상념처럼 천천히 흘러내렸다. 곧바로 시원한 육수를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오전의 모욕과 상처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혀끝에 맵싸하게 스치는 고추장 양념, 아삭한 오이채, 두툼한 고기 한 점, 삶은 달걀 반쪽까지. 입안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면을 다 먹고 나서야 그녀는 처음으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냉랭했던 마음 한 귀퉁이가 조금은 따뜻해진 듯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는 식탁 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찮아. 버티다 보면 나아지겠지…”

그녀의 스무 살은 그렇게, 밀면 한 그릇에서 위로받았다. 언젠가 이 날을 떠올릴 때, 사무실에서 들은 욕설보다는 이 밀면 한 그릇의 위로가 먼저 떠오르기를.
그녀는 기억할 것이다. 뜨겁게 눈물을 참던 그날, 차가운 육수가 마음을 데워주던 바로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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