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타인의 호의를 못 믿겠다면
나는 꽤 안 좋은 버릇이 있다. 좋게 말하면 메타인지가 높고 자기 성찰력이 뛰어난 건데, 안 좋게 보면 셀프 후려치기가 과하다. 나는 타인이 나에게 하는 모든 말에 "왜?"를 붙인다. 그 속에 담긴 감정, 평가, 의도를 해석하고 판단하려 한다. 납득이 되면 피드백으로 삼아 고치고, 납득이 안 되면 흘려버린다. 이게 내가 세상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 버릇은 분명히 '쓸모'가 있다. 날카로운 피드백을 받을 때, 부정적인 평가를 들을 때, 심지어 질투 섞인 말을 들을 때. 나는 꽤 담담하게 그것을 분해한다. 여기서 취할 건 뭐지? 버릴 건 뭐지? 이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심리적 타격이 크지 않다. 오히려 배울 게 많아서 좋을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훈계를 듣거나, 혼나거나, 쓴소리를 듣는 게 하나도 무섭지 않다. 진짜로.
그런데 문제는, 호의를 받을 때도 나는 똑같이 "왜?"를 묻는다는 것. 누군가 나를 좋게 봐주면, 칭찬을 하면, 호감을 표현하면, 나는 그걸 그냥 받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검열하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나의 이 부분만 보고 좋게 평가하는 거 아니야?' '내 다른 면을 알면 저렇게 말 못 할 텐데.' '그러면 저 호의를 내가 받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나는 나를 꽤 좋아하고, 사랑하고, 긍정한다. 그런데 타인이 나를 좋아하면 그건 못 믿겠다. 마치 불량품에 합격 도장이 찍힌 것처럼 불안하다. 한동안 이걸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칭찬에 쉽게 우쭐하지 않는 사람이야."
"나는 내 한계를 아는 사람이야."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건 겸손이 아니었다. 겸손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태도다. 상대의 시선을 존중하고, 내가 모르는 나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불완전한 정보로 내린 판단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상대가 나의 전부를 모르니까, 그 사람의 호의는 진짜가 아니라고. 일종의 기각이었다.
자존감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완전한 정보'에 대한 집착이었다. 나는 나의 전체를 아니까 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타인은 일부만 보고 판단하니까 그건 '진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이리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간은 애초에 서로의 전부를 볼 수 없다. 나조차도 나의 전부를 모른다. 10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도 못 했고, 10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내가 모르는 내가 될 것이다. 완전한 정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를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면, 누구도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 전부를 알아야 호의를 표할 수 있다면, 어떤 관계도 시작될 수 없다. 누군가 나의 일부를 보고 좋다고 말할 때, 그건 무효가 아니다. 그냥 그 사람 눈에 비친 내가 좋았던 거다. 그게 전부가 아니어도 '진짜'다. 그 사람의 진짜.
결국 이런 거였다. 나는 겸손한 게 아니라 오만했다. "당신은 나의 일부만 봤으니까, 당신의 판단은 유효하지 않아." 이건 겸손이 아니라 월권이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지는 그 사람의 영역인데, 내가 거기에 채점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호의 자체가 무서웠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 호의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 압박. 일부만 보고 좋아해준 사람 앞에서, 나머지까지 증명해내야 할 것 같은 부담.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기각해버리는 게 편했던 거다. 근데 그건 내 숙제지, 상대의 호의를 무효 처리할 이유는 아니다. 진짜 겸손은 아마 이런 게 아닐까. 내가 모르는 나를 상대가 볼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는 확신을, 잠시 내려놓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