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에게
지난 주말, 먼저 인사 나누었던 '극단 현장' 대표님이 '김장하 선생'과 만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같은 교통편을 이용했지만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조용한 커피숍이었고 기다리고 계시던 김장하 선생과 <극단 현장> 정대균 대표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장하 선생은 우리에게 조용한 웃음을 지을 뿐 별로 말씀은 없으셨다.
전에 읽고, 보았던 책,『줬으면 그만이지』(김주완기자), 그리고 MBC다큐 <어른 김장하>를
다시 일깨웠다.
거기에 소개된 막역한 친구 ‘박노정 시인’의 시가 있었다.
<사부작 꼼지락>
-달팽이에게
사부작거리는 게 네 장점이야
있는 듯 없는 듯 꼼지락꼼지락
거리는 것만으로 아무렴
살아가는 이유가 충분한 되고도 남지
사브작사브작
꼼지락꼼지락
황홀해
눈부셔
이 시에서 아마도 ‘달팽이’는 시인의 친한 친구였던 ‘김장하 선생’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는 20세 때부터 조부(祖父)가 어린 시절 지어준 아호대로 <남성(南星) 당 한약방>을 차렸고, 특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한방약을 처방하여 병을 잘 낫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본인이야말로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더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운 까닭도 있을 것이고, 자기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더 배우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평소에 “똥(人糞)을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밭에 골고루 흩어 뿌리면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지원해 준 수많은 장학생 가운데는 대학교의 유명한 교수 등, 사회의 곳곳에서 이름을 떨치며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선생으로부터 장학금 수혜를 받은 학생 가운데 어른으로 성장하여 선생을 찾아와,
“선생님의 귀한 장학금을 잘 받았는데, 좀 더 훌륭한 인물이 못되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선생이 답변하기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어, 이렇게 지탱하고 있는 것이에요.”하였고.
또, 장학금 수혜를 받는 어느 한 여학생이 있어, 당시 학생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장학금을 지원해 주셨는데, 이렇게 학생 운동하다 쫓기는 몸이 되어 부끄럽습니다.”하고 말하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데모하는 것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라고 오히려 그 운동권 여학생을 격려하였다.
장학금 받았던 수많은 수혜자들이 장성하여 선생께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는데,
특히 앞에 소개했던 문형배 전 재판관이 서울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선생님을 찾아뵙고,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을 때,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네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이 사회를 위해서 갚아라.”
선생은 한 결 같이 그렇게 말했다.
일선에서 판사가 된 문형배 전 재판관은 한 시도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어느 모임에서 그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나 감정이 격해왔던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한참을 돌아서서
마음을 추스른 다음 그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던 장면이 생각난다.
말미에 김장하 선생은 '무재칠시(無財七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재산이 아무것도 없어도 일곱 가지나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얼굴빛을 환하게, 눈빛을 편하게, 말씨를 부드럽게 등, 아주 조용조용하게 이야기하셨다.
지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은 인생, 건강을 위해 오늘도 사브작사브작 꼼지락꼼지락 산을 오르고 계신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