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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아 Nov 08. 2024

달디 단, 층간 소음 해방

중년의 테피리스트

가을인가 했더니 감기가 찾아왔다. 긴긴 여름 이 날만 기다렸었는데,

이제 와서 한여름의 뜀박질이 그리울 줄이야. 나을 듯 잔잔하게 오래가는 감기로 지레 겁을 먹고,

진짜 아무것도 안 해야 낫나 싶어 강아지 산책도, 집안일도  잠시 내려놨다. 아플 때는 시간도 더디 간다.      


감기 1주일째, 몸 사리느라 집콕 중인데 오후 5시 무렵 벨이 울렸다. 벨소리를 듣고서야

그동안 우리 집이 고립되었다는 걸 알았다. 인터폰 너머에 윗집 아줌마가 보였다. 문을 열어 보았더니

두 손 가득 뭔가를 들고 계셨다.

“우리 손자들 때문에 시끄러웠죠? 갸들이 엊그제 이사 나갔어요.”

대답도 하기 전에 봉지를 내게 넘겼다.


“시골서 따온 감인데 맛 좀 봐봐요”

우리 집에도 감이 천지라 그다지 달갑지가 않았지만 꼬맹이들의 체크아웃 소식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다른 손의 봉지도 마저 들이미셔서 난감했다.  이 많은 감을 음식물쓰레기에

버리는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 거절을 해야 했다.


 “저희 둘 밖에 없는데 하나면 충분해요”하면서 스무스하게 사양하는데

“이건 놔뒀다 홍시 만들어 먹어요”하시길래 들여다보니 대봉감이었다.  올해 첫 홍시가 반가워

나도 모르게 아무 말 없이 봉지를 낚아채 듯 냅다 뺐은 것 같다.

아마 아줌마는 아래층 여자가 대봉감을 어지간히 좋아하나 보다 눈치챘을 것이다.

사실 내가 반긴 건 홍시뿐만 아니라 소음 스트레스 해방과 내 감기를 날려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두 달 전쯤, 엘리베이터에서 윗집 아줌마를 만났다. 아줌마는

“한동안 손자들이 자기 집 인테리어 공사로 우리 집에 살아요, 두 달 걸려요”하셨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무표정을 보이느라 애썼다.   

   

그 아이들은 8살 6살 사내아이들로 아기 때 뜀박질을 할머니집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단거리 달리기와

점프를 연마하며 태릉 선수촌을 방불케 한다. 우리는 근 8년간 단련이 될 법도 한데. 이 녀석들의

몸집이 커지면서 울리는 소리가 더 커지고 있고, 더 심각한 것은 매일 아침 막내의 울음소리에

잠을 깨야만 했다. 통곡 수준의 울음소리가 강제알람이 되니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두 달간

쌓였나 보다.     


몇 번의 고비로 관리실에 연락을 할까 망설인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살이 아닌데도 그 흔한 클레임을 걸지 않은 이유는 사실 우리도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강아지는 가끔 짖는다. 우리에게는 가끔이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일 수 있다. 더 문제는 우리가 외출하고 얼마나 짖는 줄 모르기에 늘 이웃들에게 저자세로 지내고 있다. 11년 전 강아지를 처음 데려왔을 때. 과묵한 줄 알았던 아이가 정년이 마냥 목청이 얼마나 좋던지 뒤통수를 엊어맞은 겪이었는데. 하필 그 당시 온 식구가 제일 바쁠 때라 낮에 강아지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한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아줌마가 얘기를 걸었다. 혹시 윗집 개소리가 그 집도 들리냐면서, 맞다. 윗집의 윗집 23층에서도 제법 큰 강아지를 키웠는데, 그 집 개는 우리 강아지와 달리 밤에 자주 짖었다. 혹시 우리 집 강아지 소리와 헷갈리시는 건지, 아님 우회적으로 소음 클레임을 거는 건지 몰라서, 조심스레 저희 집 강아지 소리가 아니었냐고 물어보니, 이 집 개는 덩치가 작으니 소리가 작고 윗 집 개는 소리가 크다며, 그 집 개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하셨다. 아이고 안심이었다. 우리 강아지를 흔한 개소리의 카테고리에서 분리시켜주셔서 감사했다, 그러시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아이고 우리 아들이 작년에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었는데. 윗 집 개소리랑 아랫집 강아지 소리 때문에

몇 번을 달려갈 뻔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시험 붙었잖아”     


면서 해묵은 클레임과 자식자랑을 동시에 하셨다. 그동안 그 사실도 모르고 지낸 게 염치가 없었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즐겁게 장단 맞춰 드리는 수 밖에,

힘든 여건 속에서도 시험에 붙고, 아들 참 대단하다면서 기세를 살려드렸다.     


지나고 보니 그날 우리들의 대화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들의 올림픽 경기장의 초석이

다져진 것 같다. 10년 전 아버지가 받았던 소음 스트레스를 대를 이어 자식이 갚을 줄이야.




 꼬맹이들이 체크인 한 초가을 무렵 유독 비가 잦았다. 그래서 집안에서 경기가 온종일 열려도

우린 꾹 참했고, 그렇게 스트레스가 한 스푼씩 쌓이며 감기가 온 건지도......

우리 강아지도 시달려서인지  기이한 행동을 했다. 방 모서리마다 돌아다니면서 짖어댔다.

요며칠 정형행동이 사라진 걸로 봐서 층간소음 스트레스의 가장 취약한 건 얘였구나 싶어 안쓰럽다.

어쩌겠니 너도 네 업보를 씻어야지.


대본감이 서서히 익어가고 있다. 저녁 식사 후 하나씩 빼먹는 재미와 지금의 적막함이 디달고

감사하다고 알게 해 준 것을 꼬맹이들이 준 선물로 여겨야겠다. 그간 잘 참고 기다린 우리가 기특하다.

주말에 열리는 운동회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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