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색, 빨강
수년간 색채심리를 강의하면서 수강생 또는 청중을 향해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자신 있게 빨강이라고 답한 성인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이는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빨간색을 좋아하고, 상가가 밀집된 지역에 가면 어김없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빨간 간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나라 성인에게 빨강은 기본적으로 부담스럽고, 너무 강렬하여 선호하기에는 불편한 색인 것 같다. 그렇지만 역사상 빨강은 가장 오래된 색이기도 하고, 무채색인 검정과 하양을 제외하고 인류가 최초로 이름을 붙인 색이기도 하다.
그 증거들은 유럽, 러시아 지역의 약 400여 개에 이르는 동굴 유적지에 남아 있다. 고고학, 역사학, 미술학, 미술치료학 등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은 보았을 들소의 그림이 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이 그림을 처음 본다면 '참 잘 그렸다'라고 말할 것이다. 염료가 무엇인지, 어디에 그렸는지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멋진 들소의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0년에서 11,000년 전인 구석기시대에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과 새로운 기술의 발명, 그림이나 조각을 통한 예술적 표현의 발전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 외에도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섬에서 또 다른 동굴벽화가 2014년에 발견되었는데, 술라웨시의 동굴 벽에 그려진 돼지 그림은 적어도 45,5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굴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가장 오래된 유럽의 벽화와 연대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호주 그리피스 대학의 막심 오베르(Maxime Aubert) 교수는 ‘이 그림은 인간이 추상적 용어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했다.
우리가 이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사냥하는 사람과 멧돼지, 버펄로의 형상 말고도 색채를 살펴보면 어두운 빨간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빨강은 오래전부터 생명력, 사랑, 분노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상징해 왔다. 사람이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빨간색이 의식, 신화, 초자연적인 것을 서사적으로 전달하려고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언어도 없던 시기에 인간에게는 이렇게 보는 이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는 것, 그림에 색을 사용했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고고학자 수잔 오코너는 이러한 동굴벽화들이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며, 그들의 거주지와 이주 경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진화적으로 우리 인간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언어보다 더 앞서 그림이 있었다는 사실은 미술치료의 효과성을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한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빨간색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구석기인들이 돌망치를 들고 뛰어다니는 사냥 장면을 떠올리며 벽화의 붉은색은 동물의 피라고 생각할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혈액은 시간이 지날수록 갈변할 뿐만 아니라 4천 년도 아닌 4만 년 이상 색을 유지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이 사용했던 재료는 오커(ochre)라 불리는 붉은 황토인데, 산화 제1 철과 점토, 모래가 혼합된 천연 점토 안료(顔料)라고 설명할 수 있다. 색상은 노란색에서 진한 주황색, 빨간색, 갈색까지 다양하다.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숱이나 황토와 같은 안료를 갈아내는 데 사용된 도구를 발견했는데. 조개껍질을 석영암 위에 놓고 뒤집어서 사용한 듯하다. 구석기시대의 황토 유물은 종종 크레용(끝이 뾰족한 막대 모양)의 형태로 발견되기도 했으며, 그들은 황토 조각을 문질러서 긁어내거나 붉은 황토를 가루로 만들어 점액이 있는 식물과 섞어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굴 벽에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45,000년 전이지만,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붉은 황토 사용에 대한 증거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약 30만 년 전으로 추정되었으며, 이는 대체로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과 일치한다. 그들이 빨강이 좋아서 ‘이 색으로 벽화를 그려야겠다!’라는 의지가 있었다기보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적 환경에서 붉은 황토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재료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게 우리 인류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붉은 황토와 검은 숱 등으로 최초의 미술을 창조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