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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치료사 문 주 Oct 21. 2024

빨강의 심리적 속성 : 빨간 알약 vs 파란 알약

인류 최초의 색, 빨강

     중세 시대까지 빨간색은 서양에서 특권의 자리를 차지했다. 많은 문화권에서 빨강은 여러 가지 색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회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색이었다. 스페인어로 colorado(콜로라도)는 색이라는 뜻을 가짐과 동시에 빨강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color’라는 것 자체가 곧 빨강을 의미할 정도이니, 빨간색의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염색을 위해 처음 개발된 색인 빨강은 로마인에게는 전쟁에서 승리한 투사, 왕의 권력, 가톨릭 교회와 연관된 매우 귀한 색이었다. 로마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군주들이 복장으로 사회적 지위를 정의하려고 했고, 그중 헨리 8세는 사치에 관한 법률을 4개나 통과시켰다. ‘비싼 의복(costly apparel)’ 특히 빨간색 옷은 매우 엄격하게 통제했는데, 일정 계급 이하의 영국인이 붉은 옷을 입으면 40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고 한다.   

    

헨리 8세의 초상화

    



    그럼에도 현대를 사는 우리는 왜 빨간색이 부담스러운 걸까?

© 1999 Village Roadshow Films Limited.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모피어스가 파란색 알약과 빨간색 알약을 양쪽 손바닥에 놓고 주인공 네오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파란 알약을 먹으면 이야기가 끝난다. 깨어나서 너는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돼. 빨간 알약을 먹으면 원더랜드에 남아서 끝까지 가게 된다."라고 말하며 네오에게 선택을 제안한다. 즉 파란 약을 먹으면 진실을 보지 못한 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고, 반대로 빨간 약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진실의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답변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두 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왜 알약인가? 그리고 왜 진실은 빨간색인가?라는 의구심이다.     

   

      영화에서 파랑은 행복하지만 ‘무지한 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약’이라는 것은 사실상  무지는 병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반대로 빨강은 비록 그것이 진실이긴 하나, 받아들이기 고통스럽다는 것을 경고하기에, 선택의 순간에서 주인공을 갈등하게 한다. 그런데 만약 알약의 색이 반대라고 가정해 보자. 또는 빨강 대신에 초록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빨간색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고민 없이 진실을 알 수 있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심층 심리학에서도 인간은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무의식에 저장한다고 전제하는데, 영화의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친근한 파란색이 어려운 선택지에 놓일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불편한 것은 빨강이라는 색이다. 이 불편함에 대해서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선사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고귀했던 빨강이 점차 부정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서기 시작한 것은 유럽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프랑스혁명이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 붉은 깃발은 극단적 혁명가인 자코뱅(Jacobins)에 의해 채택되었고, 대의를 위해 순교자로서 죽을 각오를 한 그들의 성명으로 제시되었다.  

A poster from the Paris Commune (1871)


     오늘날 테러의 어원이 된 공포 정치(Reign of Terror) 기간 동안 붉은 깃발은 억압에 맞선 국민의 계엄령을 상징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격변은 유럽 각국의 혁명 운동을 위한 신호 역할을 했으며, 빨간 깃발은 1800년대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펄럭였다.

     지금은 사라진 소련의 국기와 중국의 국기에서도 알 수 있듯 빨강은 여전히 사회주의의 색이며, 피의 색으로서 매우 원초적인 색이다. 이러한 원초적 감각은 심장, 사랑 등과 같이 가장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증오, 분노와도 가까운 색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상충적인 감정은 현대인에게 적용되는 듯하다. 축구경기에서 심판이 들어 올리는 'red card'는 퇴장을 뜻하고, 일본을 제외한 중국, 루마니아, 러시아 등 공산국가의 여권은 거의 붉은색 표지로 되어있다. 이렇듯 극단적인 두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빨강이 ‘당연하게도’ 우리에겐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여권 표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국기 (1980-1991)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 여성 내담자 두 명의 그림을 보면 우리가 빨강에 관하여 어떠한 심상을 가지고 있는지, 치료사가 아니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분노를 표현할 때 빨강을 쓰라고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럼에도 각종 스트레스와 말 못 할 분노를 가슴속에 안고 있는 현대인에게  통로가 되어 주는 색깔은 마그마와 같은 빨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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