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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치료사 문 주 Oct 21. 2024

파랑의 역사 :  고대 그리스인들은 색맹이었나?

이름 없는 색, 파랑

     독자 여러분은 아주 소중하고 아끼는 존재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종 그 마음이 더 고조되어 갈 때 단순히 사랑한다는 말보다 좀 더 깊고 좀 더 우월한 감정의 표현을 찾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유명한 시상식에서 수상자가 ‘감사하다는 말로는 너무 부족하다’라는 소감을 밝힐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절실하고 애틋한 표현을 하고 싶을 때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느끼고는 한다. 놀랍게도 이러한 언어적 한계는 우리의 뇌에도 영향을 주어 여러분이 인지하고 있는 단어만큼 여러분의 뇌가 인식한다면 믿으실지 궁금하다. 실제 우리는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고는 하는데, 이것은 뇌의 가소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놀랍게도 색채지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현대 과학자, 인류학자들은 과거에 파란색을 표현하는 어떠한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그리스나 로마인들이 푸른색을 알아보지 못하는 청색맹(靑色盲)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머(Homer, Hómēros)가 쓴 시에서부터 알 수 있다. 기원전 8세기경에 출생한 호머는 '일리아스(Iliad) '와 '오디세이(Odyssey)'라는 서사시를 최초로 쓴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서양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Homer의 대리석 흉상


      

    1858년, 영국의 정치가이자 아마추어 고전학자인 윌리엄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은 호머가 쓴 서사시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챘다.          



                        “then Achilles, in tears, moved far away from his  companions, 

                      and sat down on tne shore, and gazes out over the wine-dark sea.”

                       (아킬레스는 눈물을 흘리며, 동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해안가에 앉아, 

                         포도주처럼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문구는 매혹적이면서도 우리에게 모호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바다를 묘사하는 수많은 방법 중에서 왜 와인과 비교해야 했을까? 엄밀히 말해서,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며, 이 문구가 사랑받아 온 이래로 독자와 학자들은 이 용어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논쟁을 벌여 왔다. 글래드스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색조가 아닌 광도를 설명하는 데 색상 용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시가 쓰였을 당시 그리스어에는 검정, 하양, 빨강, 옅은 연두색을 나타내는 단어는 있었지만, 다른 색은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파랗다’ 혹은 ‘파랑’이라는 색을 묘사하는 단어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에서 파랑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심지어 하늘과 바다는 실제로 파랗지 않다. 적어도 흙이 갈색이거나 잎이 초록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미술사에 큰 문제를 제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인류는 파란색을 구현할 수 없어서 좋아하는가? 아니면 같은 이유로 파랑이라는 단어를 만들지 않았던 것일까?  고작 동물의 1%, 식물의 5%, 과일의 8%만이 파란색을 가졌기 때문에 이 단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로마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던 게르만족의 파란 눈을 보고 미개인의 색, 이방인의 색으로 여긴 배경도 한몫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옛날에도 지금도 여전히 하늘과 바다는 파랗다. 여러 학자가 주장하듯 그들은 정말 색맹이었던 것일까?  

        이 수수께끼는 2009년 인류학자 줄스 다비도프(Jules Davidoff)가 아프리카 힘바족을 연구하면서 마침내 풀렸다. 아프리카 나미비아(Namibia)의 외딴 마을에 사는 힘바족을 대상으로 다비도프는 다음과 같은 2개의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나머지와 다른 한 가지 색을 선택하게 했다. 힘바족은 어떤 색이 다른 것과 구분되는지 찾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결과는 언뜻 그림만 보면 특수 지역의 인종이 색맹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의심할 수 있으나 다비도프의 연구는 인간이 파란색이라는 단어를 만들게 될 때까지 언어와 지각이 생리학적 기능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여러분은 아래 두 그림 중, 왼쪽에 있는 하늘색 사각형을 훨씬 더 빠르게 구분해 냈을 것이다. 그러나 힘바족이 언어는 영어와는 달리 초록에 대한 광범위한 종류의 어휘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두 번째 슬라이드에서 답을 쉽게 찾았다는 결과를 증명한다.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없다면 우리 눈에는 초록이나 회색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뇌의 신경 가소성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파랑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파랑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놀라운 연구는 우리 인간은 단어에 의해 색을 인식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러분이 만약 전시회에서 보고 있는 미술작품을 친구에게 전화로 설명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쉽다. 여러분이 구분하고, 인식하고 있는 그 색들은 오로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색 단어의 종류만큼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신경가소성(神經可塑性, neuroplasticity)은 성장과 재조직을 통해 뇌가 스스로 신경 회로를 바꾸는 능력이다. 이는 뇌의 놀라운 능력 중 하나로, 학습, 기억, 뇌 손상의 회복, 그리고 노인의 뇌 건강 유지와 관련된 뇌신경학적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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