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색, 파랑
초등학생에게 알고 있는 화가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면 즉시 대답할 첫 번째 화가가 아닐까 싶을 만큼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는 처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미술계의 스타는 아니었다. 사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 감정적으로도 매우 나약했다.
피카소의 인생에서 Blue Period 즉 청색시대로 알려진 시기는 1901년 엄청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스페인을 함께 여행하고, 프랑스 Paris까지 함께 온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Carles Casagemas)의 죽음은 20세 청년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카사헤마스는 짝사랑하던 여인과의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아 상당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1901년 2월 17일, 그녀를 포함한 친구들이 여럿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보란 듯 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쏘았다. 카사헤마스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그림을 통해 슬픔을 표현하며 절친의 죽음을 애도하기 시작했다.
카사헤마스가 죽은 후, 피카소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나중에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알게 된 후 파란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두 번째로 그린 작품에서는 프러시안 블루와 다크 그린이 짙게 깔려 있고, 첫 번째 그렸던 그림에서의 모든 붉은 톤, 특히 촛불을 제거했다. 이는 삶(빛)에서 죽음(어둠)으로의 전환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01년 말에 피카소는 그의 시대를 어둡게 표현한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나이에 따라 자신의 특징에 시대를 초월한 무게감을 부여했다. 아첨하지 않는 초상화, 얼굴은 움푹 들어가고, 옷은 천 조각들로 덧대어졌으며,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듯한 무드는 아마도 그의 괴팍한 성격이 싹트게 되는 시점일 것이다.
같은 해에 피카소는 성병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인 루이 줄리앙을 만났고 그를 통해 생라자르 교도소(Saint-Lazare Prison) 병원에 있는 여성 수감자들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사회적 비참함에 깊은 영향을 받은 피카소는 여성들(대부분 매춘부)을 아이를 둔 엄마나 마돈나로 변신시켰다. 당시 그의 작품 중 L'Entrevue(대면)는 여성 인물의 이러한 신성화를 잘 보여준다. 피카소는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자주 여행했으며, 그의 청색시대는 대체로 인물의 인간성과 깊은 고통을 전면에 내세웠다.
빈곤과 고통이라는 주제는 종교적 도상으로 표현된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지배했고, 대부분의 작품에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를 사용하여 색채의 의미를 통해 보는 이의 공감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울트라마린, 인디고 블루를 거쳐 상당히 고가였던 파란색의 염료는 18세기에 이르러 프러시안 블루가 그 맥을 이어받았는데 이 잉크색과 같은 짙은 블루는 그 색상이 우수하다고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쉽게 구할 수 있는 원자재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매우 저렴했다. 가난한 피카소에게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는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깊고 어두운 톤을 가졌다는 점에서 카사헤마스를 대신한 친구였던 것 같다.
현대의 많은 평론가들은 청색시대를 주변 세계에서 본 문제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공유하는 데 적절한 스타일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던 젊은 예술가의 노력이 돋보였던 시기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