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색, 분홍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실시간 온라인 강의가 늘어나면서 약 2년간 전국의 어린이집 보육교사를 대상으로 아동의 색채심리를 교육했었다. 그 기간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여자아이들은 왜 분홍색을 좋아하나요?’였다. 독자 중에서 어린 딸을 두고 있는 부모라면, 또는 교육 분야에 있는 분이라면 비슷한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 딸아이가 자라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자연스럽게 분홍에 대한 애착은 줄어든다는 것도 보았을 테고, 어쩌면 여성 독자 중에는 본인도 한 때 핑크홀릭이었다가 성인이 된 지금은 아니라는 답변을 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또, 분홍은 여성스러운 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꽤 많을 것이며 아들의 방을 분홍색으로 꾸며 주었을 때 그 뒷감당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당연하게 남자아이들은 파랑을, 여자아이들은 분홍을 선호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왜 당연한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언제부터 그랬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이 질문에 독자 여러분의 직관적인 답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자아이가 분홍색을 좋아하는 이유가 단 한 가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여자 어린이의 핑크에 대한 애착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서양의 어린이도 마찬가지이기에 연구자들은 과학적으로 분홍색에 대한 선호 현상을 밝히려 애써왔다.
만약 아주 어릴 때부터 TV나 인터넷이 없는 지역에서 태어나, 색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없는 곳, 도시로부터 이주한 외부인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소녀가 있다고 예를 들어보자. 과연 그 소녀도 분홍색에 열광할까? 물론 극단적인 조건이라 현실성이 없을 수 있겠으나, 놀랍게도 이와 같은 의구심을 가지고 연구한 논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호주의 학자들은 분홍에 대한 지역별 아동의 선호도를 조사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서 세 개의 소규모 사회를 찾아냈다. 그 마을의 위치는 아래 사진에 있듯 페루 이미리아호의 Shipibo 마을, 콩고 공화국 북부의 Bayaka 마을, 바누아투 타나섬의 Kastom 마을이다. 이 세 개의 마을은 서로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현대식 문화의 시스템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고 텔레비전, 인터넷 또는 라디오와 같은 대중 매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공장에서 생산된 옷과 같은 대량 생산 품목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 마을들은 큰 지역의 도시 중심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비교군으로는 도시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호주 브리즈번 시의 아이들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했다.
연구자들은 지역 언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통역가를 참여시켜 4-7세의 지역 어린이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린이는 일반적으로 큰 종이에 인쇄된 두 가지 색상(분홍색과 파란색)을 보고 어느 색상을 선호하는지 선택하도록 요청받았다.
소규모 사회의 어린이들도 브리즈번의 어린이들처럼 분홍색을 선호할까?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세 소규모 사회의 어린이들은 성별과 무관하게 분홍색에 대한 특별한 선호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도시의 소녀들은 아래 도표에서 보듯 분홍색을 선호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소녀들이 ‘유전적으로 분홍색을 좋아하도록 태어난다’라는 의견을 주장한 학자들의 연구와는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여러 국가에서 실험한 여자 아동 중 분홍색을 선호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나이는 최소 2.5세였다. 또한 이는 어린이에게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성인 여성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녀들이 환경, 특히 성별-색상 연결에서 어떻게 배우는지 사회적, 인지적 영향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소녀들은 자신이 속한 유치원이나 학급에서 여자 친구들이 분홍색 옷을 많이 입을수록 더욱 분홍을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여러분의 딸이 다니고 있는 유치원이나 학급에서 아무도 분홍색 옷을 입고 오지 않는다면 소녀들도 굳이 분홍색 옷을 입혀달라고 떼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소녀들은 자라나는 동안 바비 인형과 같은 장난감에서부터, 이부자리, 옷, 가방, 신발 등 주변에 너무도 많은 분홍색의 제품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니 소녀들이 분홍색에 열광하는 첫 번째 이유는 문화적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유전적으로 소녀는 분홍색을 좋아하도록 태어난다’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의 연구는 무엇일까? 영국의 시각 신경과학 전공 헐버트(Hulbert) 교수는 여성이 분홍색을 선호하는 이유, 혹은 적어도 남성보다 붉은색을 더 선호하는 이유에는 생물학적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연구의 참여자는 20-26세의 남녀 성인 208명이었고, 마우스 커서를 사용하여 디스플레이 중앙에 순차적으로 표시된 일련의 작은 색상 사각형 쌍에서 선호하는 색상을 가능한 한 빨리 선택하도록 했다. 결과는 남녀 모두 파란 계열의 색을 선호한다는 통계가 나왔지만, 여성은 남성에 비해 붉은빛이 감도는 라일락에 가까운 파랑을 더 선호했고 남성은 전형적인 파랑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생물학자들은 우리의 영장류 조상이 이러한 진보된 색각을 발달시킨 이유는 초록색 식물을 배경으로 붉은색의 ‘잘 익은’ 과일을 쉽게 골라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헐버트 역시 여성이 붉은색을 더 좋아한다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이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결론지었다.
이제 독자 여러분은 소녀들이 왜 그토록 분홍색에 열광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근거를 제시한 연구들을 통해 크게 문화적 배경과 유전적 배경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