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의 색, 분홍
분홍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한 색은 거의 없다.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에서 여성적인 색으로 여겨지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서양인들은 분홍색을 성별이 없거나, 남성적인 색으로 보았다. 분홍색이 그 의미가 진화함에 따라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의 거울처럼 남아 있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줄 것이다.
핑크라는 색이름은 Dianthus속의 꽃식물에서 따온 이름이며, 꽃의 주름진 가장자리에서 유래되었다.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동사 to pink의 의미를 찾아보면 ‘구멍이 뚫린 또는 뾰족하게 장식하다.’는 뜻으로 쓰였다(독일어 picken, "쪼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npadour)는 핑크 마니아였고 베르사유 궁전에 파스텔컬러 열풍을 몰고 왔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분홍색을 널리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마담 드 퐁파두르가 애착하고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세브르 도자기 회사는 생산에 사용한 분홍색을 그녀의 이름을 따서 ‘Rose Pompadour’라 명명했다. 이 회사의 고급 도자기는 18세기에 고귀함과 지위의 상징이었고, 이 아름다운 분홍색은 왕궁의 모든 장식품에 호화로움을 더해주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만 해도 분홍색이 성별과 연관되지는 않았다.
“ 일반적으로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색이고 여자아이에게는
파란색이 규칙이다. 그 이유는 좀 더 단호하고 강렬한 컬러인 핑크가 남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고,
여아에게는 좀 더 섬세하고 고상한 블루가 더 예쁘기 때문이다.”
- 무역 간행물 Earnshaw’s Infants ’ Department. 1918 -
1927년 타임지는 성별에 적합한 색상에 대한 미국 각 지역의 의류매장에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지역마다 다소의 차이를 보였으나, 60%가 분홍색은 남자와 더 어울린다는 의견으로 마감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분홍색을 빨간색의 일종으로 묘사하며, 근본적으로 남성적이기 때문에 남아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확실한 이유를 밝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현대에 이르러 분홍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을 제시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홀로코스트의 기간을 1933-1945년으로 정의한다. 이 기간 동안 나치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 다양한 유대인을 식별하기 위한 표식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중 분홍색 역삼각형은 ‘성범죄자’로 간주된 사람들에게 할당되었는데, 여기에는 동성애자 남성, 양성애자 남성이 포함되었다. 나치가 분홍색 역삼각형을 사용한 것은 1970년대까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소수자의 권리를 찾으려는 운동가들에 의해 분홍색은 다시금 서구의 시대정신에 편승하게 되었다. 당시 게이 권리 운동이 시작되면서 많은 초기 펑크 그룹이 비슷한 핑크색을 채택하기도 했다.
분홍색이 엄격하게 여성적인 색이라는 최초의 기록으로 돌아가보자. 역사가들은 이것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통적인 서구적 성 역할을 재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성들이 직장에서 밀려나 가정으로 돌아오면서 광고주들은 주부들을 다시 여성화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이상적인 주부는 주름 장식이 달린 분홍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주방용 전자 기기를 분홍색으로 생산했다.
이러한 추세가 아기 옷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태아 성별을 초음파로 식별하는 것이 일반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이다. 예비 부모는 태어날 아기를 위해 미리 쇼핑할 수 있게 되었고, 산업계는 이러한 기회를 놓칠세라 아기의 성별을 마케팅전략으로 사용하였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아동을 위한 장난감 가게 통로는 핑크로 물들기 시작했고, 이어서 채도가 낮고 부드러운 분홍색(밀레니얼 핑크라고 불림)이 백화점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우리나라 역시 대형 쇼핑센터의 장난감이나 문구코너에 가보면 지금까지도 분홍과 파랑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30년 동안 분홍색은 여성 정체성에 대한 제한성을 뛰어넘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범위에서 여성성의 상징으로 명성을 얻었다. 의미는 다르지만, 분홍색 리본은 유방암에 맞서는 강인함을 의미하게 되었고, 2017년 1월 21일에 열린 대규모 집회였던 ‘여성 행진(Women’s March)‘의 상징 컬러가 되기도 했다.
예술이나 옷에 대한 취향이 어떠하든, 분홍색 스펙트럼 중 당신에게 꼭 맞는 핑크가 있기 마련이며, 이 강렬한 색은 변화하는 문화와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므로 정치적(또는 비정치적) 성명을 나타내는 데에도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