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색, 초록
가시 스펙트럼에서 초록은 파란색과 노란색 사이에 있고,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균형의 색이라고 볼 수 있다. 색채 이론에서 초록은 파랑과 노랑을 섞어 만든 2차 색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초록을 2차 색(빨강과 파랑이 섞인 보라처럼)으로 보기보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원색처럼 인식한다. 특히 중동지역에서 초록은 이슬람교를 상징하므로 대부분의 아랍인은 초록색을 평화, 영성, 신성한 관대함과 연관시킨다.
또한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에서는 매년 3월 17일을 아일랜드의 수호성으로 추앙되는 성 패트릭이 선종한 날을 기념하여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로 정했다. 이날은 많은 사람들이 모두 초록색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각종 퍼레이드를 하며 초록색을 마음껏 즐기는 날이다. 초록색은 토키풀(클로버)에서 유래되었으며, 클로버의 세 잎은 성부, 성자, 성령을 뜻하여 성 패트릭이 초기 아일랜드 사람들을 개종시킬 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초록색은 눈으로 인식하기 위해 적응할 필요가 없어서 편안한 느낌을 주며 자연, 식물의 색이므로 인간에게 휴식처가 되는 색이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초록을 보호의 표시로 느끼는데, 어떤 지역에 충분한 녹지가 있다면 물이 있고, 물이 있다는 것은 식량이 있다는 가능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초록이 보호색으로 인지 될 수 있는 것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초록색 신호등이다. 운전자와 보행자에게 신호등에서 볼 수 있는 초록빛은 전진해도 좋다는 보호된 허락을 뜻한다. 또 하나는 위험한 상황에서 탈출구를 알려주는 초록색 비상구이다.
만약 당신이 가까운 사람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멈추고, 화재 알람이 울리는 급박한 상황을 상상해 보라. 영화관 안은 캄캄하다. 극장 안의 사람들이 당황하는 동안 두 개의 출구 조명에 빛이 들어온다. 하나는 빨간빛이고 또 하나는 초록빛이라면 당신은 어떤 문을 선택하겠는가?
인간은 빨간빛을 볼 때 위험과 혼돈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이유만으로 비상구가 초록색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비상구의 색이 초록인 것은 빛의 파장 때문인데, 인간의 눈으로 태양 아래에서 구분할 수 있는 가시광선의 파장과는 그 목적이 다르다. 우리가 낮 동안 볼 수 있는 색의 파장은 빨강이 가장 길고 가장 눈에 잘 띈다. 도심의 번화가에 가보면 빨간 간판이 즐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이 매우 어두울 때 인간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은 빨간빛이 아니라 초록빛이다. 깊은 바다에서 가시광선의 색들이 어떤 변화를 주는지 미국에서 실제 실험을 한 비교 사진을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바다를 이루는 매질인 물은 가장 긴 파장의 빨간색을 빠르게 약화시킨다. 실내에서 화재가 일어나거나 지진 등의 위험한 상황에서는 정전이 되기 마련이며, 이는 캄캄한 심해와도 같다. 여기서 빨리 그리고 가장 먼 곳까지 알아볼 수 있는 비상구의 표시는 빨강이 아니라 바로 초록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비상 탈출구에 표준 색상이 정해진 것은 아니나, 미국 화재 예방 협회(National Fire Protection Association)에 따르면 충분히 눈에 띄고 전체 배경과 대비되는 색으로 비상구 표기를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나는 색채심리 강의를 할 때 수강생들에게 색채와 관련된 닉네임을 하나씩 정해서 종강하는 날까지 사용하도록 하는데, 초록은 인기가 많아 여러 명이 서로 겹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만큼 우리 한국인에게 파랑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는 것이 초록이다. 자연을 동경하고 숲과 나무에서 평화와 안식의 느낌을 받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는 하나, 서양에서는 괴물이나 마녀의 피부색을 초록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초록에 대해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완전한 초록은 기쁨, 슬픔, 열정이 전혀 없는 가장 편안한 색이다.
지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휴식이 유익한 효과를 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진다.”
라고 말했듯 모든 색은 긍정적인 에너지와 부정적인 에너지를 동시에 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